#63 김영하 [오직 두 사람]
이 지옥도(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몹시 낯이 익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해 4월 16일 이후 목도한 일과 흡사합니다. 카뮈가 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황당한 발상은 프랑스의 철학지 피에르 바야르로부터 빌려온 것입니다. 그는 과거의 작가가 미래에 발표될 후배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흥미로운 개념, '예상표절'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문학사를 불가역적인 일직선으로만 사고한다면 이런 말은 한갓 말장난에 지나지 않겠습니다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연대기적 시간이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호 사고를 먼저 겪은 후, 나중에 [페스트]를 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작품의 발표 순서 같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수십, 수백 년 전에 쓰인 텍스트와 불과 일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후대의 수많은 소설에 영감을 주는 역사적 사건이 있는가 하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마치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문학에 어떤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언어의 그물로 엮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문학은 혼란으로 가득한 불가역적인 우리 인생에 어떤 반환의 좌표 같은 것을 제공해줍니다. 문학을 통해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독자 앞에 불려오고, 지금 쓰인 어떤 글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예감합니다.
[옥수수와 나] [슈트] [최은지와 박인수][아이를 찾습니다][인생의 원점][신의 장난], 그리고 [오직 두 사람]
이 수상 소감을 다시 읽어보면서 이 소설을 기점으로 지난 칠 년간의 내 삶도 둘로 나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그에 비해 이후의 네 편은 훨씬 어둡다. 희극처럼 시작했으나 점점 무거워지면서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중략)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앞의 세 편도 뭔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략)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연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를 찾습니다] 이후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자위와 연기는 포기한 채 필사적을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2015년에 쓴 이 문장은 그 이후에 쓰게 될 소설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일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