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그리고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말하지. 그 나라의 경제발전이 더딘 데 따른 생산력 저조, 급수설비나 도로 같은 인프라의 미정비, 혹은 주민 다수의 극도의 빈곤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단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비타민 결핍이나 단백질 부족에 따른 소아 영양실조 등의 다양한 질병을 앓으며 서서히 죽어가게 되지.
그러니까 '구조적 기아'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란다.
국제적인 거래가격은 어떻게 정해져요?
물론 이른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단다. 그러나 또한 일부 곡물 메이저와 그 밑의 투기꾼들의 조작을 통해서도 결정돼. 덤핑 전략이나, 또는 반대로 시장에서 상품을 거두어들이는 전략을 통해서 말이야. 투기꾼들이 갑자기 시장에 대량의 곡물을 방출하면 가격이 무너져 덤핑 효과가 나타나고, 반대로 곡물을 사재기하여 인위적인 품귀현상을 불러일으키면 가격이 오르게 되지. 투기꾼들은 대량의 곡물을 곡물저장탑(사일로)에 보관한단다. 가격은 단 한 갖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시카고 거래소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차드, 에티오피아, 아이티 같은 가난한 나라의 정부가 높은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따위는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매주 수백만 달러를 더 벌어들이는 것이지. 배고픈 자들의 고통? 맙소사, 그들을 위해서는 유엔이 있고 국제적십지가 하잖아 하는 식이란다.
이라크를 예로 들어보자.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사담 후세인을 철수시킨 '사막의 폭풍' 작전 중 다국적군의 지상부대는 수도 바그다드에 100킬로미터 못 미친 지점까지 진격했어. 하지만 그곳에서 탱크를 돌려야 했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의 머리칼 하나도 건드리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후세인이 제거되면 이라크 내의 시아파 세력이 정권을 잡을까봐 그랬던 것이지. 사실 이라크의 시아파는 정치적으로 이란과 가까웠어. 워싱턴의 적이지.
하지만 이제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싶어해. 유엔 회원국들은 10년 넘게 이라크에 대한 치명적인 경제봉쇄정책을 강행하고 있어. 이런 조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위법적인 선언에 근거하고 있지. 이라크는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할 때까지 제한된 양의 석유를 수출할 수는 있어. 그리고 석유수출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국제적 감시 아래 식량이나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해. 후세인은 이런 경제제대의 완화를 대가로, 국제 시찰단이 이라크의 생물학 무기나 핵무기 유무를 사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해. 하지만 미국이 바라는 것은 사실 이라크 국민들이 그런 고통을 견디다 못해 결국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지.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브레히트는 "분노하는 것은 고통이다"고 했다.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민족주체성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진자유주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의를 논할 것인가? 이제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 세계시장밖에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자본의 흐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그 유동성이 완전하게 용인되면 이윤이 가장 많은 쪽으로 자본이 집중된다는 것, 즉 자유로운 세계시장에 맡기면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주장이 자세히 검토되지도 않은 채 세계에 침투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따지지 않은 채, 그저 '경제 합리성'이라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금융전략가들은 천문학자가 천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경제적 현상 앞에 서 있다. 천문학자는 자기장을 측정하여 별들의 궤도를 계산하고, 학문적 활동을 객관화한다. 오늘날 금융전략가는 천문학자를 빼닮았다. 그들은 자연법칙을 들먹인다. 그들의 눈에는 현실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국가를 헐뜯고, 민족주체성을 헐뜯고, 선거를 통해 확정된 제도, 그리고 영토적인 경계짓기와 인간이 만든 민주주의적 규범을 헐뜯으면서 계몽주의의 유산을 파괴하고 있다.
시장원리주의의 폐해
'세계 기아행동'이라는 프랑스 비정부단체는 "식량에 대한 접근이 지불능력에 달려 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돈이 있는 자는 먹을 것을 얻고, 없는 자는 굶주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정글 자본주의다. 세계경제는 식량 생산, 판매, 무역, 식량 소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성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 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이에 세계경제의 모든 메커니즘은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한 가지 대전제는 바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국제적 구조가 마련되어야 하고 규범과 협약이 마련되어야 한다.
장 자크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경제의 유일한 견인차는 이윤지상주의라는 입장,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허구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이 시대의 급박한 과제다.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구 정치가들은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저항전선
오늘날 두 개의 발전모델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워싱턴 합의'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권이다.
'워싱턴 합의'는 1970~1990년에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과 미 지무부 및 국제 금융조직 사이에 맺어진 비공식적 신사협정이다. 이 합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네 가지 원칙을 내용으로 한다.
바로 민영화, 규제철폐, 거시 경제 안정, 예산 감축이 그것이다. '합의'는 자본시장의 완전한 자유호를 방해하는 모든 규범적, 국가적, 혹은 비국가적 장애물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에 이 네가지 원칙은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모든 경제 행위의 법칙이자 예언자이다. 이 네 가지 원칙은 머니터리즘의 독트린이다.
자율적으로 통제되고, 전능한 시장에 대한 신봉과 제임스 울펀슨(세계은행 총재)의 '국가를 초월한 글로벌 거버넌스'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권사상에 위배된다. 지구상의 모든 문명생활의 토대가 되는 1948년 12월 10일의 인권선언은 시급히 보완되어야 한다. 문맹자들에게 언론의 자유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일찍이 "선거용지가 고픈 배를 불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식량권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인권으로서, (망명자의 피보호권처럼) 새로운 국제 법규로서 시급히 도입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절대선과 절대악은 별로 없다. 대부분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본질을 규정하느냐에 따라 긍정되거나 부정된다.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장점으로 꼽을 수 잇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세 가지만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하여 자유롭게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투여한 자본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부의 창출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둘째, 시장의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모든 경제주체가 긴장하며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함으로써 기능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성취욕을 자극하여 일의 성과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적 본능이나 이기심을 자극하여 더 많이 이루고자 하는 에너지를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단점도 매우 많다. 세 가지 정도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의 전제가 잘못되어 그 개념과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모든 간섭을 없애고 자유를 줄 테니 알아서 마음껏 하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른데 알아서 하라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둘째, 지나친 경쟁주의로 치달으면 약육강식의 냉혹한 질서가 자리잡아서 다수의 약자들이 소외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낳으며 양극화의 심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셋째, 자본의 욕망이 끝없이 확대되어 불필요한 영역들까지 시장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삶에서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