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지금 다시,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민주주의는 중요한 결정을 구성원들의 의사에 따라 하는 제도다. 자유민주주의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사상 또는 제도라고 알면 된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개인의 사유재산과 자유를 가능한 한 최대로 보장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빈부의 격차를 가능한 한 줄이려는 사회주의적 분배 방식과는 거리가 멀고, 시장경제주의, 자본주의와 가깝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란 표현은 헌법 전문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헌법 제8조에서는 "민주적 기본질서"라고만 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 헌법학자들은, 민주적 기본 질서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사회민주적 기본 질서를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라고 한다. 그런 해석에 따른다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는 사회민주적 기본 질서를 배척한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바탕으로 통일을 추진할 경우, 사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북한 체제의 전면 부인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남북한의 헌법이 모두 평화통일을 외치고 있는데 왜 통일이 어려운지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평화통일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낼 수 있는 목표다. 서로의 체제를 부인하면서 전쟁으로 승부를 가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
제7조 1항,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직업적 공무원이 탄생한 것은 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제가 구축되면서이다. 국왕의 의사에 따라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충성심이 강한 신하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착된 것이 관료제도다. 왕의 뜻을 받들어 통치하는 신하로서의 공무워는 민중 위에 군림하는 특권계급을 형성했다.
시민혁명으로 봉건제도가 타파되고 세습제의 왕이 쥐고 있던 주권이 국민에게 돌아왔다. 국민의 대표자를 선거에 의해 뽑는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이루어지자 공무원 임명 형식은 엽관제로 바뀌었다. 엽관제란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행태를 사냥꾼이 짐승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즉, 정권을 잡은 세력이 자기 성향에 맞는 사람들을 골라 공무원에 임명하게 되었다. 엽관제는 국민을 다스리던 공무원을 공공의 봉사자로 바꾸어놓은 장점이 있었지만, 국가가 아닌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단점도 컸다.
필요한 것은 정권의 교체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이었는데,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직업공무원제다.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독일은 20세기 초 바이마르헌법에 이를 규정했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는 말의 의미는, 공무원은 집권자나 집권당 또는 임명권자를 위한 복무자가 아니란 것이다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특정인의 이익을 위한 충신이 아니며, '봉사자'이기 때문에 국민 위에 군림하는 특권 계급이 아니란 뜻이 담겨 있다.
정당해산제도는 '방어적 민주주의' 또는 '전투적 민주주의' 혹은 '투쟁적 민주주의'를 의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그저 다양한 견해와 사상이 난무하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제도적 폭력을 동원하여 비민주적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즉, 관용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민주적 관용이 베풀어질 수 없다. 이는 정치적 혼란을 겪던 바이마르공화국이 히틀러에 의해 파괴되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을 겪은 독일의 법과 법학에서 발전된 개념이자 제도이다. 실제로 1950년대에 독일은 나치의 후신에 해당하는 정당 하나와 공산당을 해산했다. 그리고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민주주의가 정착한 오늘날에는 어떤 극우정당을 해산할지 여부를 둘러싸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 제도와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 국민의 확신이 정착했다는 반증인 셈이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양심이 옳고 그린 것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나 판단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란 미리 정해져 있는 선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가 아니다. 자기가 선이라고 믿는 데 따라 행동하는 자유다. 또는 행동하지 않을 자유다. 양심의 자유라는 세계에서는 옳은 것이 결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에 따라 옳다고 믿는 내용이 모두 다를 수 있다. 다양하다 못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양심을 모두 인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의 개성이나 정체성을 지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나는 바로 나다.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특성을 의미한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으로 하여금 "나는 누가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사회적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좀 어지럽더라도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민주주의적 삶이다.
제22조 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인간의 정신 작용은 양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이성과 신앙의 세계로 전개된다. 종교적 믿음은 논리 체계를 벗어난 곳에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절대자 신과의 교감은 사후 세계로 이어진다. 반면 현실 세계에서 인간은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세상과 그 안팎의 만물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 행위가 바로 학문 활동이며, 그 목적을 진리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예술은 학문과는 다르다. 하지만 예술 활동의 목적이 다양한 양식을 통한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과정과 결과를 통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예술 활동도 넓은 의미의 학문 활동에 포함시킬 여지가 있다.
제27조 1항,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권리가 제대로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고, 권리에 대해서 다툼이 있을 때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제도적 장치나 규칙이 없다면 다툼은 결국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 상태를 유발할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폭력을 배제하고,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대가로 독립된 법원을 설치하여 분쟁에 대한 결정을 담당하게 했다. 이러한 재판제도는 오랜 진화를 거쳐 형성된 문명과 문화의 결실이다.
권리를 갖고 있는 것과 그 권리를 실현하는 것은 늘 같지 않다. 법질서가 부여한 권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해당하기 쉬운데, 그 때문에 자신에게 인정되어 있긴 하지만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권리를 어떤 식으로 관철할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마련한 제도가 곧 재판이라고 하는 소송제도이다.
제30조,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ㆍ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범죄는 피해자의 개인적 이익을 침해할 뿐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반사회적 행위다. 범죄 발생의 원인에는 행위자의 성향과 사회 구조적 모순이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는 범죄 예방의 의무가 있다. 형벌권을 국가에 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아가 범죄 예방으로 평화롭고 안정된 질서의 유지뿐 아니라 발생한 범죄 피해로 큰 상처를 입은 시민을 보살피고 위로하는 일도 국가의 한 일이다. 이는 바로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노력이 된다.
그런 까닭에 개인에 의한 범죄라 하더라도 범죄로 인한 피해가 커서 개인의 삶이 파괴될 지경에 이른 경우에는 국가가 나서서 구조할 의무가 있다. 물론 가해자인 범죄자에게 모든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나, 범죄자에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만족스러운 배상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정당 정치가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 일을 '대원을 차지한다'고 표현하며 거기에 매달리기 대문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정치 현상은 대통령 선거에 쏠리고, 진정한 국민의 생활과 복지 문제는 뒷전인 듯한 인상을 준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면, 그 즉시 승자는 권력 유지에 혈안이 되고 패자는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집권당 헐뜯기에 주력한다. 이런 구태의연한 경쟁은 대통령 임기를 주기로 반복된다. 그 근본 원인은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대통령제에 딨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서 개헌 논의는 주로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지곤 한다.
하지만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부 형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국민의 삶을 안정되고 인간답게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는 정부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진정한 의미의 결정이 아니다. 법관의 판결 역시 하나의 제도적 틀에서 내려지는 결정이기 때문에, 법관이 남의 지시를 받거나 무엇인가에 구속된 상태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 더욱이 법관은 법률이 불명확하거나 사건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강자의 지시나 사건의 당사자에게 구속된다면 재판은 일종의 가면극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법관의 독립은 사법권과 관련된 헌법 조항들 중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법관의 독립 또한 헌법 자체가 그렇듯이 정치권력을 순화하고 억제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것이고, 정치를 법에 정해진 테두리 속에 가두어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오랜 역사적 진화를 통해 달성된 성과물이다. 물론 법관들이 그 투쟁의 전선에 나선 과거의 예는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법관 또는 법률가 집단은 보수적이어서 역사의 새로운 장을 펼치기 위해 힘쓴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법관의 독립은 그저 법관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라는 헌법제도를 이용하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무턱대로 법관에게 자유만을 허용할 수는 없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관을 다시 붙들어 매어둘 말뚝이 필요하다. 재판을 한다는 것 또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권력은 구속하지 않으면 무모학 어리석은 짓을 감행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은 독립성을 통해 자유를 보장받은 법관이 다시 법과 법률에 구속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유와 구속의 변증법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구속을 통한 자유라고 말해도 좋다. 즉 법관은 재판과 관련해 어느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자유를 구가하지만, 오직 법률에 엄격히 구속된다. 그리고 그 법률은 주권자를 대표하는 국회에서 제정한 것이다. 법관으로 구성된 사법부는 국민이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지는 않지만, 이런 연결 고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의 법률 구속 원칙은 법관의 독립과 함께 헌법적 의미의 사법권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올바른 재판을 위해 법관의 양심과 양식이 필요한 경우는 많다. 결정은 그저 법률의 자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재판에 관여하는 사람과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에 비추어 법률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법관의 양심은 필수적 전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심은 그저 타고난 것이거나 어느 순간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나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의 하청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자립도에 따라서 실제 사정도 천차만별이다. 재정 자립도가 높은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의 견제를 받고, 재정 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서로 합병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는 여러 면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기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업무의 고유성에 기초한 자치 권한과 능력을 미리 포기하여 주민 의사에 근거를 두는 풀뿌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헌법의 제9장에서는 경제 영역의 국가 목표를 명시하고 있다.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안정, 적정한 소득의 분배,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의 방지, 경제 주체 사이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 균형 있는 지역 경제의 육성, 중소기업의 보호 육성, 소비자 보호 등이 그것들이다. 한마디로 대단한 목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유재산제도를 바탕으로 자유경쟁을 원리로 삼는 시장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부작용과 모순을 없애고자 한다. 그래야 사회복지와 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의 정신과 규정에 따를 때, 적어도 우리 경제 질서는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이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이므로 빈부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개인 스스로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과 비교하며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다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반이 맞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가 자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말이고, 반이 틀리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경제적 평등과 정의를 위하여 경제 질서에 개입해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헌법학자들이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를 가리켜 '수정자본주의', 이러한 대한민국을 가리켜 '사회국가'라 일컫는다.
오히려 제헌헌법 제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하여 경제적 평등이 인정되는 토대 위에서 경제적 자유를 실현하도록 했다.
헌법재판소도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ㆍ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제125조, 국가는 대외무역을 육성하며, 이를 규제ㆍ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우리 헌법은 대외무역에 관한 조항을 두고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외무역에 관한 조문이 헌법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 제87조 2항은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관해 유진오는 <헌법해의>에서 "대외무역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는 것은, 대외무역에 관하여 국가가 일정한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의 범위 내에서 사인의 활동을 허용하는 것"이락 설명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국가 주도하에 해외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대외 종속 우려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국민경제가 취약하고 국가의 기틀이 마련됮 않은 상태에서 강대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막을 필요성이 더 컸다는 점에서 두 번째 의미가 보다 강조되었다고 할 것이다.
현행 헌법이 "국가는 대외무역을 규제ㆍ조정할 수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단지 해외로 시장을 확대하는 것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일이 없도록 규제하고 조정해야 한다. 즉 국가는 무역 상대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국민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비록 우리 헌법이 대외무역의 "육성"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규제ㆍ조정"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규정하고 있을지라도, 경제적 대외 종속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경제적 대외 종속을 막기 위한 규제ㆍ조정은 국가의 의무로 파악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