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헤르만 헤세 [데미안]
「참.」 헤어지려는 차에 그가 말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두겠는데, 다음번엔 누나를 데리고 나와. 큰누나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의 말에 미처 대답도 못하고 서서 놀란 모습으로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내 말 못 알아듣겠니? 네 누나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크로머. 하지만 그건 안 돼. 난 할 수가 없어. 누나도 따라오지 않을 거야.」
나는 이것 역시 계략이고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그런 짓을 하곤 했는데 어떤 불가능한 일을 요구해서 내 기를 꺾어놓고는 나를 꼼짝도 못하게 얽어 다른 요구에 응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또 돈이나 다른 것으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외치다시피 말했다. 「사실상 금지된 추악한 것들도 이 세상엔 존재하고 있어. 너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단념할 수밖에 없을 거야. 난 살인이라든가 다른 여러 가지 가능한 죄악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내 스스로 범죄자가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것들을 오늘 모두 해결할 수는 없어.」 그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넌 살인을 하거나 소녀를 강간해서는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너는 아직도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무언인지 너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데까지는 못 갔어. 단지 진리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을 느낀 데 불과해. 다른 많은 부분들도 깨달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넌 한 1년 전부터 너의 내부에 어떤 충동을 가직 있었던 건데, 그것이 다른 어떤 충동보다 강하기 때문에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는 거야. 그리스 사람이나 다른 민족들은 우리 민족과는 반대로 그러한 충동을 일종의 신성한 것으로 여겨서 굉장한 축제를 벌이고 그것을 신봉했어, '금지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변할 수도 있는 거야. 오늘이라도 목사님 앞에서 결혼을 하면 누구든 당장 여자와 잘 수 있잖아. 다른 민족은 우리와는 달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역시 다르단 말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자기에게 금지된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야 하는거야. 실제 금지된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도 대악당이 되는 것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그것은 단지 편의상의 문제에 불과해!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판정해 내는 데 안일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금지된 것에 복종하고 말자. 그에게는 그것이 쉽거든.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그 금지된 것을 스스로 느끼기도 한단 말이야. 그들에게 금지되어진 일들을 다른 사람들은 매일 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허용되어진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겐 금지되어 있는 일일 수도 있는 거야. 요컨대 사람은 각자 독자적이어야 하는 거지.」
그는 갑자기 자기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 후회스럽기라도 하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때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매우 즐겁게 자기의 생각을 닥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젠가 그가 말한 것처럼 '그저 지껄이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로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서 내가 진정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울러 약간의 오락적인 기분과 재치있는 농담을 즐기는 듯한 기분, 다시 말하자면 완전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이제까지 그린 어떤 얼굴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내게 말을 건네 오는 하나의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얼굴은 이미 이전의 어느 소년의 모습은 -오래 전부터 내가 그린 그림은 더 이상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년의 얼굴처럼 보였고 머리칼도 그녀처럼 옅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이마는 단단하게 야무지게 보였고 입술은 붉게 타고 있었고, 전체적인 인상은 딱딱하고 가면 같기도 했지만 그 얼굴에는 인상적이고도 신비스러운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완성된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어떤 야릇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신의 초상이거나 신성한 가면과도 같았고, 절반은 남성적이고 절반은 여성적이었으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꿈을 꾸는 듯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엿보였으며, 남모르는 생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했고, 나 자신 속에 존재하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어느 누구와 닮아 있었긴 했지만 누구와 닮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략)
바로 그 시절,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아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야 꿈들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영상이 다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꿈속에서는 내가 그린 그림 속의 얼굴이 빈번히 생기를 띠고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 왔으며 아주 친밀하게, 혹은 적대적인 태도로, 때론 이맛살을 찡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히 아름다우며 조화를 이룬 고귀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역시 그러한 꿈을 꾼 후 잠에서 깨어나 갑자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내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만큼이나 나를 잘 알고 있는 듯했으며, 옛날부터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흥분을 억누르며 나는 그 그림 속의 얼굴을,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칼과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 그리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밝음을 지닌 억센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저절로 그렇게 말라 있었다. 나는 차츰 마음속에서 눈에 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 그림 앞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 크게 뜬 초록색이 감도는 눈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약간 치켜 떠져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오른쪽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이 그림이 누구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후 나는 종종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데미안의 진짜 표정과 그 그림을 비교해 보았다.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미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어느 초여름 석양 무렵, 서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기울어져 가는 태양 빛이 붉게 비쳐들었다. 방안에는 어둠이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베아트라체의 초상, 아니 데미안의 초상을 핀으로 창틀 가운데에 고정시키고 석양이 어떻게 그것을 투사하는지 관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얼굴의 윤곽은 없어지고 몽롱해 보였지만 붉게 그늘진 눈과 이마의 밝음과 유난스레 붉은 입술은 더욱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그 얼굴은 베아트리체나 데미안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그림과 나는 닮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도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나의 마음, 나의 운명 혹은 나의 데몬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내가 다시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그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 이러할 것이다. 나의 삶과 죽음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운명의 소리였고 리듬이었던 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기인인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존경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내가 하는 말, 나의 꿈, 나의 환상과 생각 속에서 그는 항상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서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 주고, 진지하게 의논했으며, 내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당신은 언젠가 내게…….」 그는 말했다. 「음악이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했소.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도덕가가 되어서는 안 되오!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시오. 가령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어놓았다고 해도 타조가 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단 말이오. 당신은 번번이 자기를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자책하고 있소.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불을 들여다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시오. 그래서 어떤 예감이 당신을 찾아들고 당신의 영혼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것들에 당신의 몸을 맡기시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어떤 흠모하는 신의 뜻과 일치되느지를, 그들의 마음에 드는가를 생각하지 마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파멸해 가는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그저 안전한 땅 위를 걷게 되고 그러다가는 화석이 되어 버리는 거요. 이봐요,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프락사스요. 그는 신인 동시에 악마지요. 그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소. 아프락사스는 당신의 생각이나 꿈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것이오. 결코 이것을 잊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이고 평범한 사람이 되면 그는 당신을 버릴 것이오. 당신을 버리고는 자기의 사상을 요리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찾아가고 말 것이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사물이란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것과 똑같소.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 갖고 있는 것이 이외의 현실이란 없는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오. 그들은 단지 외부의 형상만을 현실이라 생각하고 그들 내면 세계의 독자적인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소. 그렇게 한다면 행복할 수는 있을 거요. 내가 만일 다른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을 거요. 싱클레어, 대다수가 가는 길은 편하지만 우리들의 길은 힘든 거요.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시다.」
그렇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사명'은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스스로 선택하고 변경하고 임의로 지배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라는 깨달음이 날카로운 불꽃처럼 나를 불태웠다. 새로운 신을 원한다는 것은 잘못이었으며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전적을 거짓이었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란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하게 되어 어디를 가든 지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이외에는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를 깊이 사로잡았고, 이 생각이야말로 내가 이번의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때때로 나는 미래의 형상과 함께 놀았고, 혹은 시인으로서 혹은 예언자로서 혹은 화가로서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나에게 부여되었을 역할들을 꿈속에서 그려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서, 설교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그런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가 설령 시인이나 미치광이나 예언자나 심지어 범죄자로 일생을 끝낸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데 있으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일부일 뿐이며, 도피하려는 노력이고, 대중의 이상 속에서 숨으려는 행위인 동시에 순응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무섭고 경건하게 그 새로운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이미 몇 백 번이나 예감되어 왔고,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된 적이 있었을 것이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자연의 실험체이다. 미지의 것에의, 어떤 새로운 것, 아마도 허무에의 실험일 것이었고, 이 도박으로 하여금 본연의 깊이에서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나의 내부에서 느끼고 송두리째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나의 사명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삶의 방식의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잔치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차츰 '표적'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표적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상스럽다든지, 심지어는 미쳤다든가 위험스럽다고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닫고 있는 자들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점차 완전해지는 깨달음을 위해 집중되었지만, 그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에의 탐구는 그들의 의견이나 이상과 의무, 생활과 행복의 기준을 집단의 기것에 더욱 밀착시키려고 애쓰는 데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노력이 있었고, 힘과 위대함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우리들 표적을 지닌 자들은 새로운 것, 고립된 것, 미래의 것을 지향하는 자연의 의지를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들은 다만 완고한 고집의 의지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인류란- 유지되고 보호되어져야 할 완성된 그 무엇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 모두가 그것을 향한 도중에 있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없으며, 어디에도 그 법칙이 적혀 있지 않은, 그런 아득한 미래였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현 시대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단합과 집단 행동이 지배하고 있을 뿐 어디에도 자유와 사랑이 지배하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학생 단체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공동체는 강제적인 결속이며, 불안과 도피와 절망감에서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아 붕괴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단합이란…….」 데미안이 말했다.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이러한 식으로 번창하는 것은 단합이라고 할 수 없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로이 탄생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한참 동안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거지.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쳐 오는 거야. 즉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말이야!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내부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자들만의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의 법칙이 더 이상 오늘날을 살아가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과 자기들이 좇아서 살아가는 것이 로마 시대의 동판법과 같은 낡은 것이라는 것과, 그들의 종교도 도덕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거야. 유럽은 수백 년 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그저 연구만 하고 공장만 세우고 있었거든!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드릴 줄도, 한 시간만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거야. 학생 주점 같은 곳을 한 번 들여다보렴. 혹은 부자들이 드나드는 오락장이라도! 절망적이야! 싱클레어, 어디서도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란 없어. 그렇듯 불안에 가득 차서 모여든 사람들은 더욱이나 겁을 먹고 악의에 차 있으며 어느 누구도 믿으려 들지 않는 거야. 그들은 이상이 아닌 이상에 집착해서 새로운 이상을 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멩이를 던져대는 거야. 아마도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느껴. 그것이 올 거야. 머지않아 틀림없이 올 거야! 물론 그것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할 거야. 노동자가 공장주를 때려 죽이거나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한다 해도 단지 소유주만 바뀔 뿐이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건 아냐. 오늘날의 이상의 무가치함을 증명해 줄 것이고 석기 시대의 신들을 제거해 줄 테니까. 지금의 이 세계는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있으며 또 멸망하고 말 거야.」
「그럼 그땐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 어쩌면 우리도 함께 멸망할는지 모르지. 우리와 같은 자들도 맞아 죽을 가능성이 있어.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우리들에게서 남겨진 것이나 우리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의 주위에 미래의 의지가 결집될 거야. 유럽이 얼마 동안 기술과 과학이라는 시장으로 요란스럽게 눌러 덮었던 인간성의 의지가 결국에 나타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인간성의 의지란 결코 국가나 민족, 단체나 교회 같은 오늘날의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거야. 자연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바는 오히려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네나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어.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고 니체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지. 이 중요한 흐름을 위해서는 -물론 그것은 매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자만- 오늘날의 공동체가 붕괴되어 버릴 때에만 나타날 여지가 생길 거야.」
새로운 탄생과 현대의 붕괴가 가까이 와 있었고, 그것을 이미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든 하지 않든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여러 차례 나에게 말했다.
「무엇이 오게 될지는 짐작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지극히 오랫동안 쇠사슬에 매어 있는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해질 행동은 분명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상 기만당하기만 하고 얽매어 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온 천하에 드러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날이 오는 거지. 세상 사람들의 지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법률 같은 것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게 되겠지만- 오히려 의지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동행하고 그곳에 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필요하게 될 거야. 여보게, 모든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이상이 위협받고 있다면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짓을 능히 해낼 용의가 있을 걸세. 그러나 새로운 이상이, 새롭고 아마도 위험스러우며 흉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성장의 움직임이 문을 두드릴 때 거기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그때에 거기에 나타나 함께 동행할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거야. 그것을 위해 우리는 표적을 달고 있는 걸세. 공포와 증오를 일으켜 그 당시의 인류를 좁다란 전원에서 위험스러운 넓은 세계로 몰아가기 위해 카인이 표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네.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유능하고 활동적이었네. 모세와 부처가 그러했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그러했지. 그 사람이 어떤 파도에 휩쓸리는가, 어떤 극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닐세. 만약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었다면 그는 영리한 지배자는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운명적 인물은 될 수 없었을 걸세. 나폴레옹도, 케사르도, 로욜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랬던 거야!」
「사랑은 구걸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했다. 「또 요구해서도 안 되지요. 사랑은 자신의 내부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게 되는 거지요.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서 끌리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끌어당기게 되면 나는 가겠어요. 나는 아무런 선물도 드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획득당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다음번에는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영혼 속에 완전히 틀어박혀 사랑한 나머지 불타 없어질 것 같다고 느꼈다. 세상은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으며, 더 이상 푸른 하늘도 파릇한 숲도 보이지 않았고, 시냇물도 그에게는 졸졸거리지 않았으며, 하프도 그에게는 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고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커져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고 파멸해 버리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사랑이 사랑이 자기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자꾸만 강해져서 그녀를 끌어당겼고, 그 아름다운 여자는 마침내 그를 따라오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드디어 그녀가 왔고, 그는 그녀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여자가 그의 앞에 와 섰을 때 그녀는 아주 달라져 있었고,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온 세계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다는 것을 깊은 전율을 느끼며 알게 되었고,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 세계는 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몸을 맡겨 왔다. 하늘과 숲과 시내,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빛을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단순히 한 여인을 얻는 대신 그의 마음속에 온 세계를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들은 그의 내부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통해 환희의 불꽃을 튕겼다. 그는 사랑을 하였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내가 전쟁터로 갔을 때는 거의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처음에 나는 끊임없이 사격과 흥분에도 불구하고 만사에 대해 다소 실망했다. 옛날에 나는 한 인간이 이상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왜 드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선택된 이상이 아니라 공통적이고 떠맡겨진 이상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공통적인 위험이 그들을 획일화시켰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거나 죽어 가는 사람들이거나 매우 당당한 태도로 운명의 의지에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공격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때에도 목적도 모른 채 터무니없이 거대한 것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보여주는 겸허하고도 아득한, 다소 광기 어린 듯한 시선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설령 이들이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믿고 있고 그렇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그들은 소용에 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고, 그러한 그들에게서 미래는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전쟁과 영웅주의를, 명예나 그 밖의 낡아빠진 이상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는 듯이 보이면 보일수록, 표면적으로는 인간성의 모든 음성이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울릴수록, 이 모든 것은 마치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질문처럼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성과 같은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의 대다수가 내 옆에서 죽어갔지만 그들은 적에 대해 증오와 분노도, 살육과 파괴의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적이란 그 목적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과격한 것조차도 본래의 감정은 적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행동은 내심의 방사이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려고 하는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의 방사에 볼과한 것이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있는 것인데 그 알은 이 세계였고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데미안』의 그 유명한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인식을 위해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 싱클레어에겐 기성의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이 수반되어야 했다.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중성과 삶의 모순은 그러한 운명 개척과 자기 추구의 과정을 통해 본래의 자기 자신을 회복시켜 나갈 때 타파된다. 즉 삶의 상반적인 두 세계가 하나의 삶 속에서 조화롭게 통합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소년 싱클레어의 성장기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된다.
헤세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각성은 절망에서 자신으로의 발길을 통한 구원과 자아 해방에 맞춰져 있다. 그 길은 인간의 운명과 정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과의 합일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서 찾아낸 믿음과 신뢰는 절망적으로 보였던 현실에 다시 가능성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곧 자신에 대한 신뢰, 나아가 인간 정신에 대한 신뢰로 발전해 간다. 소년 싱클레어의 성장기는 바로 이러한 신뢰를 회복해 가는 도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가야 할 길은 부모로부터 유산처럼 물려받은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그의 정신 속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