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박경철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지방도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도 제가 좋은 대학을 가거나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 말대로 살면 희망이 있을까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 학생의 냉소적인 표정, 선연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앞서 인생을 사는 자세, 노력과 태도 등에 대해 늘어놓은 장광설이 그 아이의 눈빛 속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
이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인데, 가히 '생각'의 본질을 관통하는 선언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동작과 행동들은 본능에 의존한 관성일 뿐 생각의 결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은 문자의 정교한 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내 생각의 범위는 내가 알고 있는 문자의 범위이고, 생각은 그 문자의 조합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생각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문자를 알고, 그것을 조합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쫄면을 먹으면서 '이 면발은 쫄깃하기가 면을 입에 물고 울산바위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싶을 정도'라는 표현을 떠올렸다면, 그는 그사이 충분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쫄면이 왜 특별히 쫄깃한지, 글루텐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면을 삶은 온도가 몇 도인지 등에 대한 호기심도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 쫄깃해!' 하고 감탄사만 던지고 끝낸다면, 그의 생각은 겨울날 문고리의 정전기처럼 공중에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문자로 된 것들을 익히고 다른 사람의 표현방식(사유)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서는 소위 '문ㆍ사ㆍ철'이라 불리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크기는 내가 인식하는 시선의 범위만큼이다. 산속 바위에 핀 꽃은 내 눈이 그것에 닿지 않는 한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왕양명의 시 <암중화>처럼, 산속에 핀 꽃은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꽃이 아닌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꽃이 아닌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내가 인식하는 만큼이 내 세상의 크기인 것이다. 그러니 청년이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도전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세상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고, 그만큼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이 학문에 대한 네 가지 규칙과 함께, 사회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자신의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치에 복종하고 온건하며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극단적인 의견의 편에 서지 마라.
2. 행동을 취하는 순간에는 의연하고 명확한 태도를 취하라. 아무리 의심스러운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이라면 완전한 확신을 갖고 그것에 따르라.
3.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이전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라.
4. 위 세 가지를 실천하는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라.
둘째, 실제 본 적도 없으면서 우리가 '모나리자의 절묘한 미소'에 감동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감이 그림과 일치해서가 아니라 모나리자에 대한 설명과 해설을 수없이 들어서 생긴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루브르 박물관이나 시스티나 성당에 가서 <모나리자>와 <천지창조>를 직접 보고 올 기회가 생겼다고 하자. 그림을 보는 순간 깊이 감동받아 가슴이 떨릴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위대하다고 알려진(혹은 위대하다고 규정된) 미술작품을 직접 '알현'한 것에 대한 순진한 '흥분'일 가능성이 크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에서는 늘 극단적 고독이 느껴진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표정은 패배자의 익숙한 그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질서 속에 놓은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민은 내일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이나 새로운 자동차 또는 요트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그들의 망연자실함은 오히려 자기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절대고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독을 느끼는 것과 타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진짜 고독은 타인과는 늘 함께하면서 참 나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것이고, 이것을 가리켜 우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두려워한다. 오랜 시간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역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역시 철저하게 비실존적이다. 공자는 속성만을 강조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다움'이란 실존과 대립되는 가장 극적인 대비다. 당신 역시 그렇게 자신을 단련하고 담금질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 우리가 태어난 것이 의도한 것이 아니듯 삶을 의도대로 살 수만은 없다. 또 원하건 원하지 않건 죽음이 기다린다. 그것의 의도를 비켜가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죽음이라는 규정 안으로 더 빨리 뛰어든 어리석은 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관계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속성은 거부하면 할수록 강하게 우리를 압박한다. 결국 해법은 속성과 실존적인 고민을 함께 병렬로 처리하는 것이다. 속성이건 실존이건 무엇이 우선하면 어떤가. 우리가 철학자의 논쟁에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열심히 뛰고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덮치는 고독과 소외와 갈등 역시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내야 한다. 만약 그것이 힘들다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일어나면 된다. 누군가 말했듯, 넘어짐은 단지 일어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우리의 삶에서 20대는 준비, 30대는 질주, 40대는 수확의 시기다. 20대에 준비하지 않으면 30대에 질주할 힘이 없다. 사회에 나가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들을 쏟아내기 위해서는 20대에 지구력과 근력을 키워야 한다. 많은 지식을 쌓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깊이있는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질주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나가는 시기가 바로 20대인 것이다. 20대에 힘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30대에 질주는 커녕 출발선에 주저앉기 십상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의미있는 발자국을 남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20대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30대에는 내가 가진 마지막 한방울의 열정까지 모두 토해내며 거침없이 달려야 하는 것이다. 20대의 방황은 30대의 회한을 불러올 뿐, 에너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청년의 시기에는 무조건 발산하지 말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무조건 추종하지 말고, 남들이 축제를 벌일 때 오히려 내 밭을 갈아야 한다. 가슴속에 불덩어리를 가볍게 토해내지 말고, 차곡차곡 다스리고 응축해서 여의주를 만들어 입에 물어야 하나. 그리하여 인생의 본격적인 출발선에 섰을 때, 그 불꽃을 힘껏 내뿜으며 거침없이 달려나가자.
하지만 아렌트는 살인자(아이히만)의 가증스러운 답변을 두고 그것은 단지 '무지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차분하게 결론지었다.
그 덕분에 아렌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아픔을 외면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유대사회에서 매장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이 보고서는 '악마적 행위를 한 사람도 의외로 평범할 수 있다.'라는 그야말로 평범한 진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은 단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 등 세 가지 무능함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기술한다. 즉 아이히만은 스스로의 특별한 의식 없이 단지 '조국의 명령'이라든가 '게르만의 영광' 같은 지극히 단조로운 용어의 노예가 된 사람이며, 이런 몰이해와 비판 능력의 부재가 결과적으로 거대한 악의 실체였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라고 선언한다. (중략)
이런 대중의 '평범성' 혹은 '진부함'은 누가 일깨워야 할까? 그것은 바로 지식인의 몫이다. 건강한 사회에는 '진부함'을 깨뜨리는 '지적 긴장'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담론을 공급하고 진실과 거짓 혹은 선과 악에 대해 신선한 지적 질문을 던지면서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이요 의무다.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한다.
-파스칼(Blaise Pascal)
그 후부터 청년들이 필자에게 고민을 상담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장점과 단점 10가지씩을 적어보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대개 장점은 서너 가지밖에 적지 못하지만 단점은 10가지를 다 채운다. 뜻밖에도 우리는 자신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잘 알 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를 앞에 놓고 당분간 장점을 채우려 하지 말고 항목에 적힌 단점 중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것을 버리려는 노력을 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 다시 만나 자신의 장단점을 다시 적어보라고 하면 놀랍게도 줄어든 단점의 숫자만큼 장점이 늘어나서 그 수가 비슷해진다. 단점을 줄인 자신감이 장점을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이 단계가 완성은 아니다. 결심이 강한 초기단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만 자칫하면 금세 원위치가 되기 쉽다. 이는 습관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만 잘 극복하면 그 후로는 자신이 극복해온 성과에 애착이 생기며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게 새롭게 얻어진 태도가 새로운 습관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엔트로피 Entropy>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학자들은 지난 20만 년간의 인류문명 발전이 그동안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인류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 경의를 표하는 우아한 시각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지금까지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0.1퍼센트의 창의적 인간이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꿈꾸지 않는 것을 꿈꾸며, 모두가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 깃발을 꽂고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라고 외치면, 0.9퍼센트의 안목있는 인간만이 그것을 알아보고 그들과 협력하고 후원하며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결과다. 나머지 99퍼센트는 이 1퍼센트가 모든 것의 기초를 닦고, 새로운 계단을 놓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위에 올라와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또다시 그곳에 안주한다.
반면 철학이 바탕이 되는 학문의 특징은 수평적이고 산발적이다. 문학, 사학, 철학 같은 인문학들이 그러하다. 이런 학문들의 특징은 드넓은 들판에 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바탕 위에 칸트를 쌓아올리고 그 위에 다시 헤겔과 라캉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사유는 각각의 사유 그 자체다. 강신주 선생의 말을 빌리면 데카르트의 철학이 있고 칸트의 철학이 있으면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미적분을 모르면 로케트를 발사할 수 없지만, 데카르트를 몰라도 데라다를 논할 수 있다. 철학적 사유의 특징은 자못 독립적이며 수평적이며 자유롭다. 인문학은 이런 철학적 특징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이 인문학의 존재이유다. 과학기술 시대에 '높이 더 높이'를 외치며 첨탑만을 쌓아올리고 인문학이라는 땅을 다지지 않는다면 정작 그 탑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끝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즉, 과학기술이 하드디스크라면 인문학은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 당위고, 과학에서 수학을 민문에서 철학을 중시하는 이유다.
한편 서양작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노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모든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성공은 단지 한 분야에서만 얻을 수 있으며, 우리가 선택한 직업은 일생을 통해 오직 한 개의 인생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이것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일(직업)을 적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일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약 내가 선택한 길이 옳다면(그렇게 선택된 것이라면) 대담하게 행해야 한다. 사람이 이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성공적인 삶이다. 어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요인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우리의 선택은 대부분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가 되기 쉽다. 나그네를 집에 데려와서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리면 길면 잘랐다는 이 끔찍한 이야기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 상황에 의해 강요될 경우 우리가 처할 수 있는 난관을 상징한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장점을 선망하기보다는 타인의 성과를 질투한다. 질투와 선망은 천지차이임에도 그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쟁심을 버리기는 몹시 어렵지만, 질투가 아닌 선망으로 전환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즉,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가슴이 떨려야 한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만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낫지만,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도 반드시 있다. 이때 타인의 장점을 질투하면, 그의 장점은 가려지고 약점만 두드러지는데, 이 경우 나는 나를 개선시키거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버린 셈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선망으로 전환하면, 그 사람의 장점을 내가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대립이 계속 격화되고 있다. 시장경제체제가 완숙기를 지나면서 시장에서 성장한 대자본이 성과를 부당하게 세습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회를 잃은 약자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대기업은 상대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늘려가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만큼의 부와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내부거래, 편법 증여와 상속 등을 서슴지 않으면서 약자들의 기회를 더 약탈하고 있다. '시장원리'라는 신성불가침한 명분이 이런 부당함에 대한 견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에서 수혜를 받고 있는 주류들이 스스로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시스템을 고칠 수 있는 힘은 주류에게 있지만, 주류가 스스로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딜레마다. 이때 시민의 자각과 힘이 중요하다. 지금은 낫과 창의 시대도 혁명의 시대도 아니다.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온 사회시스템 중에서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체제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시스템을 고쳐서 영속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시민의 임무가 될 것이다.
시민은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계층간에 균형을 이루고 개인들이 누구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건강한 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청년은 현대사회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개선은 이미 시스템에 길들여진 기성세대의 몫이 아닌 장차 개선의 수혜를 입게 될 청년들의 몫이다. 자신들의 문제를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관리자본주의에서 시장(금융)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지난 몇십 년간의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서 산업자본의 발전이 근로자와 대중의 삶의 질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이 사라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본권력이 대의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대중의 위임을 받은 정치권력을 누르고 국가사회의 어젠더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골드먼삭스를 가버먼트삭스(government socks)라 부르는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미국은 겉으로는 완전한 민주주의체제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권력이, 자본이 제공하는 정치자금과 인력풀로부터 대단히 자유롭지 못한 나라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의 금융위기다. 2000년 이후 2010년까지 10년간 미국민의 개인소득은 증가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GDP는 19퍼센트나 증가했다. 그럼 늘어난 19퍼센트 과연 어디로 갔을까? 이것이 위기의 핵심이다. 신자유주의의 번성으로 지난 수십 년간 자본은 점점 비대해졌지만 편중된 자본축적은 도리어 찬양되었다. 시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상대적 욕망'을 찬양하고 부추김으로써 성장하는 것이므로 더 쌓고 더 늘리고 더 모으려는 욕망은 당연하다고들 했다. 그래서 슈퍼리치(super rich), 소위 큰 부자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 부를 축적하는 과정보다는 결과물인 부의 크기를 경배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누군가의 계좌에는 평생을 쓰고도 남을 엄청난 부가 쌓이지만 누군가는 마이너스통장에 의지해 살아가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마치 옆집에서 사람이 굶어죽는데도 만석꾼의 창고에서는 쌀이 썩어나가는 것과 같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쌓인 부가 대대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역기능이다. SNS의 약점은 역설적으로 '대중성의 부족'에 있다. 기본적으로 SNS는 온라인상의 친분이 우선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만 반응한다. 때문에 SNS상에서 나의 견해는 늘 옳은 거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맺지 않은 대중들이 모두 자유롭게 반응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집중적이고 확산성이 강한 SNS는 정작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동종교배가 일어날 수 있는 폐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략)
때문에 SNS에 오고 가는 담론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며, 한 가지 견해를 두고 모두가 옳다고 착각하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만약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책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고 언론사라면 자사의 논조가 대중의 중심을 대표한다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못마땅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동의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친다. 그래서 SNS상의 의견들은 비판에 민감하고 그래서 비판은 암암리에 위축된다. (중략)
SNS의 활성화는 이런 사회문화적인 측면뿐 아니라 산업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부가가치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 것이다. 10명이 만나면 상당한 가치가 만들어지고, 100만 명이 만나면 더 많은 가치가 만들어지며, 1000만 명이 만나면 엄청난 가치가 창출되는 세상이다. 그 중심에 소셜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IT혁명 이후 잊혀졌던 플랫폼의 중요성이 재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확산이나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 정치적 실패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그를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empathy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변화해야 한다. 아니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필자의 경우에도 순간순간 노화하는 자연의 변화와 함께 원고가 한 줄 한 줄 늘어가는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변화에는 수동적인 변화와 능동적인 변화가 있다. 수동적인 변화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지만, 능동적인 변화는 나를 실존케 하는 증거이자 내 삶의 면류관이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취해야 할 <주역>의 기본원리는 계사전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라는 구절에 모두 녹아 있다. 이 아홉 글자의 뜻을 우리말로 풀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영원하다'는 뜻으로, 이 말은 사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궁하다는 것은 난관에 부딪혔다는 뜻이다. 우리는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면 대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충우돌하거나 상황을 원망하며 자포자기한다. 아마 지금 청년들의 처지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주역>은 '막히면 변하라'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즉, 스스로 변하는 것이 해법이라는 뜻이다. 바위가 길을 막고 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굶어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두더지가 되어 굴을 파든지 나비가 되어 나아갈 궁리를 하라는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뚜벅뚜벅 걸어가 꽝 하고 부닥쳐야 한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더라도 그냥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말라는 정언명령이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렇게 변하면 결국 통하게 될 것이니, 늘 그렇게 통함으로써 영원하라는 말은 실로 감격적이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