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근육통
"섬유근육통이요? 그게 무슨 병이에요?"
처음 그 진단명을 들은 환자의 눈에는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떠 있다. 드디어 이름이 붙었다는 안도, 그러나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불안.
섬유근육통 환자가 들어오면, 진료실 공기는 먼저 의심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환자의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얹어 놓고 간 것이다.
"검사는 다 정상인데요." "염증 수치는 깨끗해요."
말을 꺼내는 쪽은 의사인데, 먼저 움찔하는 쪽도 의사다. 이 말이 또 한 번, "당신은 멀쩡하다"는 오해로 들릴까 봐.
그래서 설명을 시작한다. 이건 비염증성 통증이라고, 근육이 썩고 있는 게 아니라 뇌 안의 통증 조절 센터에 오류가 생긴 것이라고. 통증 관련 물질의 균형이 무너져, 실제로 아무 자극이 없어도 통증 회로가 혼자 불이 붙을 수 있다고. 그래서 이 통증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신경계 질환이자 진짜 통증이라고.
종이에 회로를 그려가며 이야기한다. 통증 신호가 올라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 브레이크와 엑셀에 해당하는 신경전달물질들, 중추감작이라는 낯선 이름까지 꺼내 든다.
속으로는 같은 말을 계속 되뇌인다.
"이건 실제하는 통증이에요."
설명은 달라지지만, 도착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다.
혹시나 낙담한 환자가, 자신이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낄까 봐. 혹시 "아무 이상 없다잖아요"라는 말을 또 듣고 돌아가, 약 봉투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릴까 봐.
설명은 길고, 표정은 짧다.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눈빛은 여전히 저 먼 곳에 서 있다.
"그럼… 저는 평생 이 통증을 안고 가야 하나요?"
대답은 정직해야 하고, 동시에 절망이 되지 않아야 한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통증이 0이 되진 않아요. 하지만 10에서 5가 되면 견딜 만해져요. 일상생활이 가능해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진료실에서 웃으며 뵐 수 있어요. 깨끗하진 않아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안다. 오늘 이 진료실 밖으로 나가면, 그 통증은 다시 혼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 더 길 것이라는 걸.
그래서, 끝에 가서야 말은 아주 짧아진다.
"많이 힘드셨죠."
사실, 그 많은 설명 중에 환자의 마음에 정말로 도착하는 문장은 이 한 줄뿐일지도 모른다.
"검사는 정상이에요"도, "중추 감작"도,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도 다 흐려진 뒤에, "많이 힘드셨죠"만 남는다.
그 말을 하고 나면, 때때로 환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 바뀐다. 눈가가 붉어지거나, 숨을 길게 내쉬거나, 갑자기 말을 멈춘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환자가 중얼거린다.
"아무도 몰라주니 내 몸이 원망스러웠었어요. 처음 그런 얘기를 들어요."
섣부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다음 환자를 부르지 못했다.
내가 해온 설명들이, 혹시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사로서 나는, 자꾸 설명을 붙들고 산다. 검사 결과, 기전, 논문, 가이드라인. 그것들이 틀린 건 아니다. 섬유근육통이 신경계의 과민화, 중추감작, 통증 조절 회로의 오류라는 건 분명한 과학이다.
하지만 진료실 문이 닫히면, 환자가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설명서가 아니라 문장 하나인지도 모른다.
"꾀병이 아니다." "많이 힘드셨죠."
나는 오늘도 통증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이야기하고, 약과 운동과 수면을 처방한다. 그러나 결국, 환자 곁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처방은 말의 형태일 것이다.
"당신의 통증은 진짜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료가 끝나고, 환자가 문을 나설 때까지 나는 그 말들을 마음속에서 다시 적는다.
다음 환자를 위해, 그리고 조금은 나 자신을 위해.
오늘도 나는 설명을 먼저 하고,끝에 가서야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건넨다.
"많이 힘드셨죠."
아마 환자에게 전해지는 의사의 말은, 결국 이것뿐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한 마디면 충분한 날도 있다.
몇 번의 진료 뒤에 받은 편지는
가슴을 아프게 했고,
동시에 나를 오래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