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떼게 될 그 한 발이 도망이 아니기를
온갖 게 힘들어도 잘 버텼다.
몸이 아파도, 밤잠을 설쳐도, 까다로운 환자가 의자를 박차고 나가도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라고 말할 만큼은 남아 있었다.
진료실 문은 그렇게 매일같이 열리고 닫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동안 버텨 온 방식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몸이 먼저 무너진 건 아니었다.
일이 힘들어서 주저앉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부러졌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 문장이 부정당하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흔들림이 밀려왔다.
아프다기보다는 내가 쌓아온 시간 전체가 한꺼번에 기울어지는 느낌에 가까웠다.
자존심. 그까짓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바르르 떨리는지.
오늘도 진료실에는 사람이 넘쳐나고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병력 듣고, 손 만져 보고, 검사 보고, 처방 내리고, "꾸준히 드세요"라는 말을 건네는 일.
그런데 문득, 그 모든 시간이 나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는 말한다. 견디면 된다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원래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마음은 다른 말을 한다.
나는 이 방식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부정당한 채로 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틀렸다는 말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이게 도망인지, 선택인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다음부터는 오직 한 가지만 보게 됐다.
나를 무디게 만드는 쪽이 아니라 나를 벼리게 하는 쪽에 서겠다는 것.
떠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일 수도 있다.
지금의 방식과 언어,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는 것.
반대로 남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일 수도 있다.
끝까지 말하고, 설명하고, 책임지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어느 쪽이든, 나를 무디게 만드는 방향은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지금 이 순간, 내 편이 되어 주고 있다.
그렇게 써놓고도,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정말 그런가. 나는 몰랐던 건가, 보고도 넘긴 건가. 방관한 건가, 못 본 건가.
그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면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진다.
구차해지기 싫다.
다만 내 삶이 더 밟히는 게 싫어서
어거지로라도 잘해야 하는데,
어거지가 안 되는 시기다.
언젠가 떼게 될 그 한 발이
도망이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