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멀리멀리 가보고 싶었지만,
그다지 멀리 가보지는 못했다.
늘 그렇듯 소속이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들이 발목을 붙잡았고,
그렇게 나의 여행길은 늘 주변에 머물렀다.
언젠가 왔던 곳,
언젠가 봤던 것,
언젠가 먹어본 것.
그렇다고 나의 주변 여행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월에 바뀐 경치를 바라보는 일,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경치를 바라보는 일.
그 역시 상당히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나는 요즘 그런 것들로 나의 여행은 채워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언젠가 예전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던,
다기나 도자기 같은 소도구나 소품들이
나의 발걸음을 자주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런 것들을 여행지에서 주섬주섬 챙겨 오는 경우도 많아졌다.
어느새 혼자 즐기는 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법 많은 찻잔들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여행지에서 사모은 대다수의 잔들이
찻잔이 아닌 술잔, 다시 말해
흔히 말하는 일본의 사케 잔이라는 것을 말이다.
편견일 수 있지만,
찻잔은 단아하고 어쩌면 소박한 그런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으나,
결정적으로 위트나 재미가 있는 제품은 찾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아하고 소박하고 또 고풍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위트 있고 재미난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찻잔보다는 술잔이 많아졌고,
최근 그런 술잔에 차를 마시는 경우도 왕왕 생겼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술잔으로 태어났건,
찻잔으로 태어났건,
그 안에 품은 것이 차라면 찻잔일 것이요.
그 안에 품은 것이 술이라면 술잔이 되는 것일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태어났고,
또 무엇을 품으며 살아가고 있을 걸까?
꼭 뚜렷한 무언가가 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내가 품고 있는 것은
무엇하나 비우지 못해 술도 차도 아닌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담아내든,
무엇을 품고 있든,
결국 잔은 가득 찰 것이고 넘쳐흐를 지도
아니면, 적당한 때에 적당한 곳에 흘려버릴지도,
어쩌면 입안으로 털어 버릴지도...
이런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 향과 맛은
세월에 불구하고 그 향과 맛을 간직하고 있을 지도
세월에 바뀐 색다르고 신선한 향과 맛을 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의 여행길처럼 말이다.
그 향과 맛을 음미하는 일은 먼 훗날에 재미이니,
지금은 뭐가 됐든 채우고 품어가며 나아가 보기로 하자.
다만 그것이 독이 아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