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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게 잡혀 먹는 척 당신에게 잡혀 먹고 싶었습니다

by 송유성 Mar 22. 2025

나는 술을 좋아해요. 우리 엄마도 술을 좋아하죠. 아,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엄마는 술에게 잡아먹혀서 술을 싫어했어요. 근데도 외로운 엄마에게는 술밖에 친구가 없어서 밤이면 술과 함께 긴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엄마를 보면서 술은 조심해야 하는 친구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그를 만날 때 나는 조심해야 하는 친구인 술을 조심하지 않았어요. 그를 만나기 전의 저는 술과 여행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친구도 같이 만나며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사이가 참 좋았는데요, 그를 만나고 나서 술이 저를 잡아먹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와 나와 술, 셋이 함께 좋은 사이였는데 언제부턴가 슬픔이 끼어들어서 넷이 되니 질투한 술이 나를 잡아 먹어갔어요.     


나는 슬픔을 등에 업고 슬퍼하기 위해 술을 먹었어요. 맨정신의 저는 맘껏 울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사랑받는 여자라고 나를 다독이고 수백 번 수만 번을 그래도, 그래도, 을 생각하느라 울 시간이 없었거든요. 나중에는 그의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 위해서 술과 함께했던 것 같아요.     


나는 많은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의 모든 행동에 이름을 붙였어요. 좋은 것은 더 큰 이름을, 나쁜 것은 조금 작은 이름을 붙였죠. 무엇이든 이름을 붙이면 애정이 생겨요. 그를 사랑하는 일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슬퍼지는 것들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사랑을 위해 이름을 붙였는데 나중에는 의미 없는 이름표만 내 손 가득이었던 것도 같아요.     


그가 부여하지 않은 그의 이름표들을 양손 가득 들고 어디에도 붙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날이면 나는 그의 앞에서 들큰하게 취해갔어요. 그런 날에는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요. 울려고 작정한 마음을 안주 삼아 취해요. 그런 날에는 내가 그에게 무슨 말들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요. 대체로 이런 것들을 물었던 것 같아요. 내가 당신 삶과 함께하고는 있나요. 같은.     


그가 내 곁을 떠나고 친구를 버렸어요. 이름표들은 추억으로 작은 유리병에 간직하고요.     


그와 함께였을 땐 씁쓸하고 코끝을 아리게 하는 알코올이 제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는 절교를 했어요. 더 이상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의 곁에서 쏟아내고 싶었던 감정은 나를 버려야 할 수 있는 고백이었다면 그가 떠나고 쏟아내고 싶은 감정은 나를 구해내야 할 수 있는 고백들이었으니까요. 구하는 것은 더 힘이 세고 더 용기 있고 더 다정한 쪽이 그렇지 못한 쪽을 도와주는 행위니까, 그렇다면 나는 나를 위해 더 온건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술은 더 이상 내 옆에 둘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단것을 먹기 시작했어요. 저는 종교를 믿지 않고 미신을 따르지 않으며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요.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단 것을 추종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에게 새로 생긴 종교예요. 디저트 교에요. 이별한 모든 사람이 단 것을 추앙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나른한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에 먹는 단 음식은 마음을 구원받는 것 같아요. 조금 조용하고 공기가 느슨하게 풀어진 오후에 먹는 달달한 음식은 기분도 말랑하게 해주고 슬픔도 워이, 하고 조금 내쫓아 주거든요. 경험하고 느꼈으니까, 종교로 믿을 법한 것 같아요. 하지만 단 음식도 골라서 적당히 먹어야 해요.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오히려 기분을 해쳐요. 단 음식은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고 또 살이 찐다는 걱정이 생기거든요. 종교도 과도하면 현실을 잘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거잖아요.     


헤어지고 나서 술을 끊고 디저트를 먹게 되었다는 내 말에 H동생이 제게 그랬는데요. 그 사람 옆에서 술을 먹지 않고 운동을 꾸준히 했으면 그가 떠나지 않았을 수도요. 하고요.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를 만나는 동안은 나에게 술이 필요했고 무너지는 나도 필요했던 것 같거든요. 흘러내리지 않고 그 사람 옆에 있었다면 나는 딱딱해져서 먹지도 뱉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거든요. 내가 수많은 이름표를 만드느라 허덕이는 날들이 없었다면 그를 그만큼 사랑할 수도 없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그는 조금 슬픈 네이밍이 더 어울리는 남자였답니다.    

 

그래도 가끔 술에 취하고 싶어요. 술을 핑계로 그의 집에서 노래를 들으며 홀짝이던 와인이, 내가 울면 옆에서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던 그 사람을 떠올려 보고 싶거든요. 그가 나와 헤어지는 날에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적으라고 했으니 적어봅니다.      


“다음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어떤 종교도 필요 없을 때 나랑 좋은 술이나 한잔 먹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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