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보다 짧은 밤을 지내고
길어지는 낮의 시간을 축소하는 사람,
그는 무늬예요. 낡고 오래된 무늬.
오늘도 아침 일찍 운동을 갔다 왔어요. 운동을 같이하는 친구가 제게 그러더군요.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너는 어쩐지 집착 같기도 했어. 그 사람을 꼭 사랑해야 한다는 집착 말이야.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다 대답했지요.
모든 사랑이 하나의 마음만으로 이루어지진 않겠지. 그렇지만 사랑해 주고 싶다는 집착이 생길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긴 했어.
계절이 바뀔 때쯤 그와 헤어지고 벚꽃이 완연한 계절도 지나 초록이 무성해졌어요. 슬픔과 그리움은 옅어지고 그 사람에 대한 아득한 존경과 사랑했던 이유는 여태 남아있습니다. 너무 울어 비틀거리던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쭈그려 앉아 있던 나를 안아 침대에 눕혀주고 가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납니다. 다정하지 않아서 많이 울었는데 다정해서 사랑했어요. 모든 형용사는 사람에게 수식하면 분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다정한 분야. 그가 다정하지 않은 분야. 그가 사랑이 가능했던 분야. 그가 사랑이 가능하지 않았던 분야. 한 사람에게 명확하게 어떠한 사람이라고 누가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다채롭고 다채로운 만큼 다양한 슬픔이 존재하겠습니다.
나랑 그는 전공이 달라서 성공적으로 나아가면 새로운 사랑에 대한 이론을 개척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합의에 이르지 못해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다른 것들에 대한 고민, 이해, 수정들을 해왔던 시간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제 곁에 있습니다. 슬픈 마음은 그곳에 두고 전 지금을 살아요. 앞으로도 그가 남기고 간 자료들을 새로운 사랑이, 새로운 고민이 생기면 들여다보겠지요. 사랑이 끝났다고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의 목적이 꼭 결혼이나 운명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다면 실패이겠지만 모든 사랑은 사랑을 낳아두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사랑해 주고 싶다는 의지는 그의 단점까지도 사랑하게 했으니까 어쩌면 처음 달성하는 기적 같은 결과였던 것도 같습니다. 한 인간을 성장시키는 일을 말입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마음의 끝에 까슬히 사포처럼 남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내 곁에 없고 이제 그의 인생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에요. 그가 다시 나무만 보고 살 것 같아서예요. 함께 오르던 수많은 산의 정상에서 보던 숲을, 큰 풍경을 잊고 나무만 나무의 결과 나뭇가지의 끝만 보고 살 것 같아서입니다. 저를 만나고 일 년쯤 지나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던 ‘낭만’도 ‘사랑’도 다시 저 멀리 벗어던지고 살 것 같아서 마음 한쪽이 따끔해져요. 제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의 삶에 낭만과 사랑이 가득하길 바랐는데, 헤어졌을 때의 그를 생각해 보면 그는 그것을 다시 벗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거든요. 그는 그런 것들을 안고 가기에는 아주 약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가 아주 연약한 사람인 것을 저는 처음부터 알았어요. 알아서 함께 민달팽이가 되어 무난해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가 어리광을 부리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아주 어려져서 자기 멋대로 울고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듯이 사랑을 내놓으라고 떼도 쓰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의 곁에 있을 때 모든 응석을 다 받아주려 했지만, 그는 다시 늙어버렸어요. 그의 시간이 거꾸로 갔으면 좋겠어요. 부디. 약하고 여린 그가 잘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아이처럼 해맑고 감사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