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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요 Nov 04. 2024

삶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중

삶은 언제나 저 멀리서 당신을 보고 있다고 우리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마치 작은 음모를 들은 것처럼 그 말을 마음속에 숨겨 들여다보았던 것 같아요.     

어제는 산에서 낯선 사람과 말을 나누었어요.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매일 같은 코스를 달리는 사람이죠. 낯선 사람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은 점차 낯섦을 상실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어제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작은 산의 전망대를 지나 뒷 산 중턱에 있는 절까지 달렸습니다. 가을이 오다가 어, 지금이 아닌가 보다. 하고 뒷걸음질 쳐 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이 무덥고 습했습니다. 나는 옷을 벗어 돌려 짜면 물이 나올 만큼 젖어선 절 앞에 넓게 펼쳐진 평야를 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색색 거리며 숨을 돌리고 있는 데 옆에 앉아 계시던 등산객 차림을 한 아저씨가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아가씨, 매일 여기 요 앞에 뛰어댕기대”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어 뛰어다니던 나를 보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겸연쩍어져 그렇다고만 하고 웃었습니다. 아저씨는 나에게 엄지척을 들며, 매일 뛰어다니는 것이 대단하다고. 부지런하다고. 하셨지요.

낯선 분에게 칭찬을 들어 부끄러워져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교수님께 삶은 언제나 당신을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득 달리기와 요가를 하면서 삶이 많이 바뀌어 있다고 느낍니다. 요가를 하면서 알게 된 동생들과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다녀오기도 하고 같이 요가 수련을 위한 보강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달리기에 빠지고는 그렇게 마셔대던 술을 끊게 되었죠. 돌아보면 내가 술을 좋아해서 마신건지 얼룩진 마음을 잊고 싶어 마신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저는 술을 양껏 마시긴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바뀌게 된 것 아니었습니다만, 그렇게 변하니 좋은 사람들이 많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술만 마셔댈 때 나는 계절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초록이 무성하던 낙엽이 발에 밟혀 바스락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어도 나는 나쁜 계절만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나쁜 계절을 안고 살면 삶은 더 나쁜 일을 주었습니다. 그런 나쁨은 잘못 삶은 문어처럼 질겨서 아무리 질겅질겅 씹어 잘라내고 맛보려 해도 좀처럼 단맛을 주는 일은 없었지요. 그러면 나는 생을 소화시키지 못해 늘 더부룩한 기분 나쁨에 팍팍한 미간만 구겨대고 있었지요.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우연히, 운이 좋아서, 갑자기 내가 사랑하게 된 것들을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 아닐까요. 삶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어서 나쁜 아이에겐 산타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처럼 내가 살아온 내력이 주르륵 어딘가에 적혀있고 그 기록의 정산값이 한 번씩 턱턱, 좋든 나쁘든 입금되는 일 말이에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나조차도 모르겠는 깊은 결핍으로 힘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정답을 찾아 헤매는 일 끝에 나는 달리게 되었고 요가하는 사람이 되었죠. 그건 아마도 내가 오랜 시간 쌓아온 정산값을 이제 받고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산에서 만난 낯선 아저씨의 칭찬처럼 우연이라기엔 나는 달리고 있었고 많이 모자라지만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으려고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깨닫는 요즘, 고민하는 일들이 순대 썰 듯이 숭덩숭덩 썰어져서 한 봉지에 마구 섞여 팔려나가는 듯한 막연한 기분도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는 기록하고 달리고 요가합니다. 나의 마음이 글로 남아있고 나의 고민이 몸에 기록되어 가는 일이겠지요. 그러면 언젠가는 두 다리가, 치열하게 유치하고 또 미숙하게 생각했던 마음에도 근육이 붙어 있겠지요. 그러면 또 삶은 어디선가 저 멀리서 나를 보고 있어서 좋은 값을 턱 하고 치러 줄지도 모를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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