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들뜬 주변 분위기와 달리 유독 헛헛한 감정이 부유하던 새 밑, 2023년 계묘년을 이틀쯤 앞둔 어느늦은 밤이었다.
남편과 나, 둘만 덩그러니 남겨진공간에서 각자제 할 일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주위엔쥐 죽은 듯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그런 분위기가 익숙하고 편안했지만 얘들도 자리를 비운연말에 왠지 궁상맞은 것 같기도 하고 요맘때만 누릴 수 있는 특수처럼떠들썩한 분위기에 섞이고 싶은 기분도 들어 요 며칠 저녁을 먹으며 TV를 켜두곤 했다.
10시가 넘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방황하던 시선이한 곳에 머물렀다. 그렇게 우연히 그녀의 정원과 마주쳤다.
주변에 인가라곤 찾아보기 힘든 깊은 산속에서 일흔두 살의 한 여인이 자기만의 정원을 꾸미며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삶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정원 가꾸기를 하며 노후를 살아가는, 요즘 중년들의 로망이며 트렌드인 삶을이야기하겠거니 했다.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해 10여 년째 '여백의 정원'을 만들어 가고 있는 전영애라는 노교수 이야기였다.
평생독일의 대문호인 '괴테'에 빠져 그를 전공한 것도 모자라 방 하나 가득 그에 대한 책들로 공간을 메우고 밤이면 그의 책을 번역하다 옆에 마련된 초라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청한다는 그녀. 지금 자신에겐 한 평도 안 되는 그 공간이면 충분하다며 연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낮에는 3000평이 넘는 방대한 정원을 가꾸느라 그녀의 몸은 한가할 틈이 없었다.혼자서 몸을 써가며 나무와 꽃, 잡초들과 씨름하며 단련된 그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몇 사람의 품이 드는 일을 너끈히 해나갔다. 자신을 삼인분 노비, 오인분노비라 칭하며 성가신 일들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에게 노동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정원이 여타의 개인 정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한한 애정을 머금은 채 사람을 향해 열려있다는 것이다.
세상살이에 지쳐 스러져가는 젊은 영혼들이 이곳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몸을 혹사해가며 그렇게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참 많은 걸 받아다며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담담히 말하는 그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그녀가말했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
바른 길로 가고 있다면 좀 미련하고 바보같이 살아도 괜찮다며 먼저 살아본 어른으로서 삶의 지혜를 넌지시 귀띔해주기도 했다.
그녀의 최종 목표는 '괴테마을'을 짓는 것이라 했다.
그 마을이 완성되면 모토로 넣을 글귀도 준비했다며 소녀처럼 괴테가 한 말을 읊조린다.
날개와 뿌리.
부모는 자녀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자녀가 굳건히 바로 설 수 있게 뿌리내릴 수 있는 힘 또한 주어야 하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결코 싶지 않은 삶, 혼자서 그러한 꿈을 계획하고 실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힘겨움과 고비가 있었을까? 그러한 과정을 견뎌내고 즐기면서 그녀의 꿈은 신념이 되고 그녀 자체가 되어다른 이들의 희망으로옮겨가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삶을 통해 몸소실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잔잔하면서도 결코 작지 않은 감동을받은 건 어쩌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의 꿈과 어느 정도 닿아있다는 느낌 때문일지도모른다.
내가 감당해야 할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책무에서 자유로워지는 날,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들...
그저 어렴풋한 마음뿐, 그 어떤 방향이나 뚜렷한 목표 없이 부유하던 생각들에 물꼬를 터주는 듯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미래의 노동력까지 쏟아내며 만들어 가고 있는 그녀의 '괴테마을'은 다음 세대에 대한 그녀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의 결정체가 아닐까?
우리 시대의 진정한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 같은 존재인 그녀를 보며 난 조심스럽게 새로운 2023년을 꿈꿔본다.
새해에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만 일반에게 공개한다는 그녀의 정원을방문해보고 싶다.
나의 꿈에 대해, 아니,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에 대해 그녀의 정원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 시대 진정한 어른의 울림 있는 지혜를 꼭 한 번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