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명절을 보내며...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연습
명절을 보내고 난 며칠 동안 멍한 상태였다.
명절 당일, 간소하게 차례를 지낸 후 시동생 가족들과 맛있게 식사도 하고 디저트까지 잘 마무리했다. 전 날 늦게 도착했기에 미처 나누지 못한, 그동안 쌓인 얘기도 좀 하고 아쉽게 작별인사를 나눈 후 방에 들어선 순간, 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침대에 쓰러졌다.
잠을 청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려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이번 명절엔 될 수 있으면 몸을 혹사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려 했다. 따로 제사음식은 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자는데 모두 동의했기에 칼자루는 내가 쥐었거니 했다.
하지만 시작하고 보니 일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짜야할 새 판을 앞두고 난 한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
말은 뱉었지만 갑자기 제사 음식을 줄이는 건 차치하더라도 한 두 끼나마 함께 식사를 하려면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처음이라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어 먹이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지고 메뉴를 짜고, 또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기까지 생각보다 만만찮은 시간이 들었다.
2교대를 하는 시동생의 직업특성상 명절 전날 저녁 7시쯤 도착한다는 소식에 흔쾌히 괜찮다 하고 혼자 아침부터 음식을 만들었다. 그나마 밑반찬은 일주일 전부터 한두 개씩 만들어놓았고 남편이 집안 청소와 밑재료손질을 도와줘서 그날 늦게나마 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해야지... 이걸 빼면 먹을 게 없는데...
하다 보니 가짓수가 늘어나 일을 줄이려 했던 내 잔꾀에 내가 넘어간 꼴이 되어버렸다.
자유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에게 갑자기 허락된 자유가 이런 건가 싶었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그 자유의 무게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는 걸 절감했다고나 할까?
그 결과에 욕먹지는 말아야 한다는 하잘것없는 자존심과
내 일이 아니기에 철저히 무관심한 타인의 태도에 가끔씩 올라오는 부아를 혼자 삭히기도 했다.
될 수 있으면 복잡한 머리는 비우고 몸을 쓰며 명절을 맞고 또 그렇게 보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예의상 하는 소린 줄 알지만 저마다 맛있게 잘 먹었다는 칭찬과 이제 내게 주어진 숙제가 거의 끝나간다는 안도감에 힘겨운 기억들을 하나씩 지우며 올해의 첫 명절을 또 그렇게 보냈다.
명절을 끝내고 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전통이든 악습이든 몇 백 년을 이어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그리 녹록지 만은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혼자 분기탱천해 앞장은 섰지만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데에는 또 지난한 고민과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막상 힘들다고 이제 막 물꼬의 방향을 틀기 시작한 물줄기의 흐름을 원래대로 돌이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애초에 내가 계획한 대로 앞으로의 명절은 어느 누구의 희생을 발판삼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가 즐거울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아들이나 그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도 될 수 있으면 명절이 하나의 즐거운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다음 과제임을 직감했다.
어쩌면 시작은 사소한 내 일신의 안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나 또한 다음 세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남편이나 다른 이에게 힘들다고 징징대지만 말고 잘못된 것은 서로 의논하고 시정해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임을, 그리하여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또 한 번의 명절을 보내며 조용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