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미 Feb 14. 2023

길 위에서 네 명의 악동을 만나다.

낯선 이들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의미


 그들과 처음 맞닥뜨린 건 베트남 여행 첫날,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

 

 저마다 편한 반팔티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칠부바지, 비슷한 키와 체격의 소유자인 그들은 나이가 육십은 족히 넘어 보였다.

 우리보다 서너 시간 앞서 도착한  네 명의 악동들은  모자 둘이서 온 팀과 함께 우리와 식사자리에 배석했다.

 "이렇게 세 팀이 1조로 원팀입니다."

 가이드는 우리 세 팀이 앞으로 일정을 같이 할 거라며 원팀임을 재차 강조하고는 맛있게 식사하라는 말을 남기고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준비된 불고기 전골이 끓고 있는 동안 현지 식당직원을 부르더니 술을 시켰다.

우린 첫 대면이라 쑥스럽기도 해서 우리 가족에 집중하며 애써 외면했다. 그들은 다낭 대표맥주인 '라루'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유리컵에 맥주와 정체불명의 액체를 섞었다. 맥주는 금방 핑크색으로 변했고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식사와 함께 반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방에서 꺼낸 것 그것뿐이 아니었다. 따로 빈 접시를 부탁해 집에서 준비해 온 듯한 두어 가지 반찬을 수북이 쌓아놓고 함께 먹기 시작했다.

외국에 온 첫날부터 굳이 한국 반찬을? 우린 곁눈질로 힐끔거릴 뿐 달리 내색하진 않았.


 그들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식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가이드가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지만 만사태평,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그 자리에서 밤이라도 새울 기세였다. 우리도 식사가 끝난 지 한참이라 멀뚱 거리고 있었는데 아들들이 갑갑해하길래 분위기상 남편만 남겨두고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자 바깥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우리의 눈치를 살피던 가이드가 몇 차례 들락거린 후에야 그들은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처음엔 민폐가 아닌가 생각했다. 서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남생각은 안중에도 없, 일명 꼰대들이 아닐까 의심하며 앞으로의 여행일정에 낀 예상밖의 먹구름에 몰래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들들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들을 썩 탐탁해하진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길지 않은 여행기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미운 정이라도 쌓인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발현되는 그들의 유쾌함이 무표정했던 우리의 얼굴을 미소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버스나 배로 이동하면서, 때론 바로 옆에서 식사를 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잠깐식 마주치면서 예의상 주고받는 얘기 속에서 그들에 대한 신변잡기적인 정보를 듣게 되었고 어느새 그들을 향한 곱지 않던 시선에 따뜻한 온기가 더해졌다.


그들이 내어놓은 정보에 의하면 1960년생인 4명의 어르신들은 전라도 전주 출신의 고향 친구들이었다.

함께한 세월이 길어선지 체격과 키, 심지어 성긴 머리숱까지  비슷한 데다 식성이며 주량까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서로를 닮아 있었다.

 경상도와 달리 시종일관 조분조분 뱉어내는 서로를 향한 디스공격에서조차 유머와 함께 애정이 묻어났다. 함께한 3박 5일 동안 누구 하나 자기주장을 펼치거나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늘 유쾌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어느 날은 현지에서 공수했다며 검은 바탕에 흰 줄무늬가 쳐진 캔버스화를 나란히 맞춰 신고 나타나 다른 팀들을 파안대소하게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어느새 눈에 익었다고 보따리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반찬을 우리 식탁 위에도 올려놓았는데 한 분이 직접 캐서 담았다는 더덕과 고들빼기 무침이었다.

식사 때마다 술과 함께 섞어 반주삼아 드시던 정체불명의 핑크빛 액체는 다름 아닌 오미자주였음을 한 잔 받아마시며  그 시큼하고 달짝지근의 맛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분들 볼수록 참 귀엽고 재미있으신 것 같아."

그들의 마력이 무심한 아들의 마음에까지 닿았나 보다.

그들이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거나 교훈을 주고자 어떠한 훈계를 한 적은 없었다. 시종일관 서로에게 농을 걸며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로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모습은 짓궂지만 미워할 순 없는 악동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날 다낭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며 생각했다. 나는 저 나이 때쯤 마음 편히 여행하며 함께할 친구들이 있을까? 주변의 지인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아직은 저마다  끝나지 않은 가족들 건사로 바쁜 이들뿐...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기면 저들처럼  좋은 사람들과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한 여행에 오를 수 있을까?

어느새 나는 머나먼 타국에서 만난 악동들이 걸어놓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주문나지막이 읊조리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또 한 번의 명절을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