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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Dec 09. 2022

광해, 외교에서 빛을 발하다.

광해군을 다시 읽다. (2)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살았던 조선 중기에는 명나라가 그 세력을 잃어가고 북방에 흩어져있던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후금(1616년,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꿈)을 세워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명나라와 후금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서 조선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했을까?


 건국이래 중국을 섬겨왔던 조선으로선 당연히 명을 따르고 오랑캐인 후금을 배척해야 했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에 대해 사대를 외치는 주변 세력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따를 순 없었다. 그에겐 제3의 길이 절실했다. 겉으로라도 명과 의리를 지키는 척하며 후금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그것만이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조선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광해군의 실리위주의 중립외교는 몸소 겪은 두 번의 왜란(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터득한 경험과 안목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7년의 왜란 동안 분조의 책임자로서 몸소 전국을 돌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광해군은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명에서 지원 나온 군사들의 행태로 미루어 부정부패로 무너져가는 명의 실상을 목격했으며, 떠오르는 후금의 기운 또한 감지했을 것이다.

 혹독한 전란의 체험을 최전선에서 겪었던 광해군은 그 시대 동북 아시아의 판세조선의 안보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가짐으로써 더 이상 전쟁에 휘말려선 안된다는 각오 또한 다졌을 것이다.


 광해군의 이러한 생각은 왕에 등극하자마자 불거진 외교정책에서 드러난다. 명나라가 재조지은(명이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한 은덕)을 들먹이며 후금을 토벌하기 위한 파병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광해군은 중국어에 능통한 강홍립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은 작전지시를 내린다.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숙달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광해군이 내린 지시에서는 우리 군의 헛된 희생을 바라지 않는 왕의 마음이 읽힌다.

 이후 원정군을 이끌었던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고 비밀리에 후금에 대한 정보를 계속 광해군에게 보낸다. 그리고 강홍립을 역적으로 몰고 그의 가족을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그들을 돌보며 강홍립과의 서신과 물자교류도 허락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전쟁을 하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하라고 밀지를 보낸 증거는 없지만 위의 사항을 미루어 짐작컨대 사전에 광해군과 강홍립 사이에 뜻하는 바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광해군은 지속적으로 주변 정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명이 재차 요구한 파병 요청에도 조선의 지리적 위치상 파병보다 조선을 후금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명에 더 유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오히려 명에 역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렇듯 후금에겐 지속적인 선린 정책(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친선을 도모하는 외교정책, 광해군은 주로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며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려 했음)을 쓰며 더 이상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명에겐 갖은 이유를 들어 파병 제안을 늦추거나 소극적인 태세를 취하며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최후의 상황에 대비해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조총과 장검을 들여오기 위해 왜란으로 단절했던 일본과의 외교도 재개하고 화포와 화약 확보에도 신경을 썼으며 병력 확보와 지휘관 기용에도 만전을 기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광해군 때엔 가까스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 모든 수고로움이 결국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명분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도 남을 그 명분은 바로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시대엔 이것이 얼마나 큰 대의였는지 광해군 편에 섰던 대북 파마저 돌아서 결국 왕의 자리에서 밀려나 여생을 대역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왕권강화에 집착해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많이 숙청했고 여러 개의 궁궐을 재건하느라 국고를 탕진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혹자는 외교에서도 광해군이 그 시대의 정세를 올바로 읽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광해군은 거란족이 세운 대금과 송나라를 사이에 두고 중립외교를 펼쳐 성공한 고려를 본받으려 했지만 조선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광해군 시대 후금은 대금에 비해 미약한 세력이었는데 협력관계인 명을 거슬러가면서까지 필요 없는 눈치를 봤고 이후 인조는 강해진 청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시했다고 고려와는 반대로 행동한 두 왕의 정책을 싸잡아 비판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면서도 준엄하다. 어떻게 보면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우린 왜 역사에 대해서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진지한 ?

아마 그곳에서 우리의 현재를 들여다 보고 자손들의 미래를 계획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은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더 이상의 과오를 범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조상들의 지혜를 헤아리고  또한 우리의 혜안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의식과 비판적 수용, 유연하면서도 냉철한 응용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를 에둘러  '경제'라는 이념 아래 소위 미래 먹거리를 두고 전 세계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지금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독 광해군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의 실익을 위해 잔뜩 날이 서 있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금의 이 정국이 아마 그 시대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외교가 탁월했든, 오류가 있었든 간에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발휘해서 그 이상의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며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광해군의 소환이 절실한 까닭이 아닐까?


마지막편 <오늘날의 외교, 광해군을 소환하다.>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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