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을 다시 읽다 (1)
첫째,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사 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인조 때)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겪게 된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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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