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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Dec 06. 2022

  광해, 왕이 되기까지...

광해군을 다시 읽다 (1)

 

 얼마 전 조선 16대 왕인 인조와 그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다룬 [올빼미]라는 영화를 관람하고 난 후, 그들의 시대가 궁금해졌다.

 문득 오래전 잠시 역사에 빠졌을 때, 줄을 쳐가며 읽었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하 조선왕조실록)이란 책을 기억해내곤 그 책을 찾기 위해 동안 등한시했던 책장의 책들을 들여다 보았. 빛이 바래고 먼지가 쌓이긴 했지만 다행히 버려지지 않고 책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책 정리 과정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아 다시 내 손에 쥐어진 꼴이, 마치 그 많던 당쟁과 사화에도 살아남아 그날의 진실을 알리려는 소리 없는 몸부림 같아,  금서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편을 읽고 나니 그와는 반대되는 노선을 걸어 결국 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의 치정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과 함께 희대의 폭군으로 치부되었지만 폭정을 일삼았던 연산군과 달리 차후 재평가되고 있는 광해군, 엇갈리는 평가로 해석 또한 다양해서 여러 영화나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폭군이라는 왜곡된 이미지 뒤에 가려진 정치적 성과들, 특히 높이 평가되는 그의 실리적 중립외교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러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광해군은 왕이 되기까지 수많은 고초를 겪은 인물이다.

아버지 선조는 자신이 적자가 아닌 방계(직계에서 갈라져 나온 존속들)출신 왕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아들만은 적자를 세자로 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실부인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하고 결국 두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 둘을 얻는데 그중 둘째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바람과는 달리 적자도, 그렇다고 장남도 아닌 애매한 입장이었는데 나중에 어렵게 세자가 되었어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명나라의 고명(중국황제가 주는 일종의 임명장)을 받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처하기도 한다.

 

 장남인 임해군이 성질이 포악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일찍부터 형대신 세자로 책봉될 재목으로 여겨졌던 광해군은, 무슨 연유인지 자신을 탐탁잖게 여기며 자꾸 세자 책봉을 미루는 아버지 선조와 수많은 갈등을 빚었다. 임진왜란 때 비로소 분조(비상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가 시행됨으로써 힘겹게 세자로 책봉된

그는, 전쟁 중에 백성을 저버리고 멀리 피난 간 선조를 대신해 세자로서 맡은 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저력을 보여 백성들의 민심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 또한 선조에겐 질시와 견제의 대상으로 작용했고 선조와의 관계가 더욱 틀어져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던 중 1606년, 광해군에겐 더 큰 시련이 닥치게 되는데, 아버지 선조가 새로 맞은 인목왕후에게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보게 된 것이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로 나뉘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당시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기에, 현실적인 판단으로 결국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인목대비 또한 언문 교지를 내려 마침내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광해군은 과감한 현실정치를 해나갔다. 대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를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사관들에 의해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되면서 오랫동안 저평가되어온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 이는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왜곡한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사실은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두 가지 이유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첫째,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는 이 명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사 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인조 때)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겪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반정을 합리화할 명분으로 광해군이 폭정을 했으며, 형제를 죽이고 불효했다는 점을 든 것 또한 타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 (중략) •••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저자는 오히려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이 한결같이 사대주의자이거나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반정이 아닌 반란에 불과했다고 일침을 놓고 있다.




 물론 학자마다, 사람마다 평가는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란 전쟁와중에 한 나라의 세자로서 큰 역할을 맡아 백성들을 지켜내면서 광해군은 두 번 다시는 이와 같은 전쟁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편까지 등을 돌리게 만든 중립외교를 고수하진 못했으리라.

 또한,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즉위하자마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숭명반청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것만 봐도 광해군의 실리위주의 중립외교가 얼마나 기막힌 처방이었는지 알 수 있다.


 광해군은 비록 대명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 피우지도 못하고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지만 그가 오늘날의 우리 정치와 외교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라고 했던가? 지금 우리에게는, 전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는 미국과 그에 못지않게 몸집을 불리고 있는 중국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외교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이에 지금 이 시대가 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정치의 소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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