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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Feb 11. 2023

베트남 바나힐에서 수능 결과(정시)를 마주하다.

해발1487m에서 경험한 인생의 가장 쓴 맛


 2월 6일. 베트남 여행 세쨋날, 우린 아침 일찍 해수관음상으로 유명한 영흥사를 둘러보고 바나힐로 향하고 있었다.

 12시가 가까운 시, 난 둘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과... 확인했어...?"

 "... 2시에 나와..."

 다소 긴장된 표정의 아들이 말했다.


 다행이었다. 혹시 좋지 못한 결과로 아침부터 맥이 풀린 모습으로 나머지 여행 일정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를 아들생각에 조금이라도 그 시간이 늦춰진 것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영흥사의 해수관음상

사실, 오늘 아침부터 긴장상태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의 시차를 고려해 베트남 시간 7(한국시간 9시)부터 은근슬쩍 아들의 모습을 훔쳐보며 녀석이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좋은 소식이었으면 제가 먼저 환호성을 질렀을 터, 아들의  침묵은 항상 불길한 기운을 잉태하고 있었다.


 가슴을 한차례 쓸어내린 후 우린 다시 여행에 몰두했다.

다낭시내에서 4~50분 달려 도착한 바나힐은 그 명성에

차고 넘칠 정도로 신비하고 멋진 곳이었다.

 중국 장가계에 케이블카가 생기기 전까지 세계 최장 길이를 자랑하던 전력이 무색하지 않게, 두 번을 갈아 태우는 수고러움을 감수하며 우리를 하늘 바로 아래, 천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바나힐 선 월드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우리가 서 있는 아래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하늘 끝에 맞닿을 것 같은 바나산 정상에 수많은 유럽풍의 고성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우뚝 선 놀이동산이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다국적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찾기 어려웠고 그 소란스러움은 하늘에 가 닿을 정도였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무언가는 해야 할 것 같아 점심 이후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 우린 하이에나처럼 탈 것을 찾아 헤매 다녔다. 유명한 레일 바이크는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리다 포기하고, 그중에 비교적 기다리는 시간이 짧은 실내 자이로드롭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조금 대담해진 우린 둘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미 2시를 훌쩍 넘긴 시간, 떨려서 결과를 보지 못하겠다는 아들을 다독이며 빨리 확인하고 잊자며 부추겼다.


골든 브리지

 그렇게 우린 놀이기구를 타고 핫스폿으로 통하는 골든 브리지를 거닐며 그 순간을 즐겼다. 아들의 마음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난 그랬다.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디 인생에서 대학이 전부인가? 아들도 우리도 최선을 다했다. 재수를 포함해 2년 동안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막내라 그런지 철이 없고 무엇이든 대충 시늉만 내던 아들이 낯선 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홀로 그렇게 열정을 쏟는 모습을 우린 처음 보았다. 이왕이면 결과까지 좋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건 우리 재량밖의 일,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혹자는 결과가 좋지 않으니 그동안 들인 노력이며, 시간, 돈 등이 모두 부질없는 것 아니냐며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평생 살아오면서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든  또한 무난하고 좋았던 일 못지않게 수없이 견뎌낸 시련과 실패의 경험들이었으리라.

 아들에게도 이러한 경험들이 녀석의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기에 난 묵묵히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린 저녁에 야시장에 들러 각자 지인에게 줄 선물도 사고 물건값도 흥정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둘째도 위로하고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밤도 기념할 겸 맥주와 안주거리도 샀다.


둘째의 기분이 괜찮은 걸 확인한 후 기분이 업된 우리가 좀 앞서가고 말았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사실을 맞닥뜨린 지 하루도 안된 아들에게 군대며 알바, 장래 문제까지 한꺼번에 쏟아놓고 보니 현타가 왔는지 아들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아뿔싸, 아들에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을...

우린 곧 후회하며 사랑해서 그런다느니, 너를 믿는다느니 의례적인 말들로 허겁지겁 상황을 마무리했다.


 아들에겐 큰 감흥이 없었겠지만 그 순간 우리가 뱉은 말들 중 어느 것 하나 진심이 아니었던 건 없었다. 그동안 공들여 온 탑이 무너졌기에 지금 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 또한 무너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여태껏 익힌 경험과 노하우로 새로운 탑을 쌓기 위한  또 다른 여정의 시작임을 아들이 하루빨리 인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우리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서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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