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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Feb 17. 2023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진정 분개해야할 때를 모르는 우리들의 자화상

 

 오랫동안 쓰고 있는 농협 통장이 있었다. 요즘은 스마트 뱅킹을 하다 보니 통장 쓸 일이 거의 없어 잊고 지내다가 한 번씩 필요할 때 쓰려고 찾으며 숨바꼭질 놀이가 한 참이다. 온 집안의 서랍들을 죄다 열었다 닫았다, 그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며칠 전이 그런 날이었다. 입금할 일도 있고 은행 업무를 보는 김에 통장을 정리하려고 찾았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영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자석 테이프가 벗겨진 그 이전 통장을 들고 가까운 농협을 들렀더니 아뿔싸 내 통장이 단위 농협 거라 폐기된 통장으론 내가 방문한 농협중앙회에서는 새 통장을 만들 수 없단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업무만 보고 은행을 나왔다.


오늘 근처에 갈 일이 있어 통장을 재발급받을 요량으로 일부러 단위농협을 들렀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번호표가 알려준 내 차례는 16번 째였다.

 은행업무를 마치고 걷기 운동을 할 요량으로 남편과 같이 왔는데 10분을 기다려도 번호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린 답답한 마음에 근처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농협을 방문했다.


 1명쯤 줄었나? 대기하는 사람은 더 많아진 상태였다. 30분이 지나도록 대기줄에서 1~2명 정도 빠졌을까?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창구를 가만히 지켜보니 6개 좌석에 4명이 앉아있었는데 2명은 수북한 서류정리에 정신이 없었고 다른 2명은 보험상담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은행업무를 보는 창구는 하나도 없었다. 지점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은 안쪽 사무실 손님을 받고 있는지 드문드문 왔다 갔다 할 뿐 도무지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고객들이 앉아 기다릴 좌석도 몇 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기 시간이 1시간을 넘기 나도 슬슬 부아가 났고, 나보다 훨씬 더 기다렸음직한 어른 한두 명의 불만 섞인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냥 가기엔 기다린 시간이 너무 아까워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보험이랑 은행업무를 구분하여 창구를 배분해야지... 그 복잡한 와중에서도 직원은  창구를 차지한 고객과 보험 종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상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수익이 좋은 상품을 우선시하는 세태라지만 이건 은행인지 보험회사인지...

 

 4시가 다 되어가도록 10 명선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급기야 나도 한마디 하고 말았다. 은행업무를 위해 한 창구라도 확보해야지 단순 업무를 보기 위해 여태까지 기다린 사람들의 시간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인가?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듯한 지점장은 크게 당황한 기색 없이 죄송하다는 의례적인 말만 내뱉을 뿐 그 이후에도 상황의 변화는 없었다.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내 앞에 7명을 남겨두고 그냥 은행문을 나서고 말았다.


 이미 반쯤 스러진 햇빛을 안타까워하며 우린 걷기 시작했다.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들도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겠지... 그들만의 애로가 있을 거야... 애써 역지사지해 보지만 그들의 불합리한 일처리나 타인에 대한 무사안일한 태도에 화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의 본질은 나에게로 향했다.

나에게 직접적인 불편이나 불이익이 올 때는 이렇게 화를 삭이지 못해 분노를 표출하는데 비해 아무리 국가적인 큰 일이라도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면 너무도 무심하게 흘려보내며 가볍게 치부하곤 했던 나 자신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화를 냈던 어르신이 곧 자신의 차례가 자 일을 마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난 것처럼 나 또한 나의 편의가 충족되다면 이렇게 불을 머금은 듯 가슴이 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따지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터부시 기존 문화에서 칫 갑질로 보일까 두려워 불합리한 일을 보고도 그저 모른 척하는 경우 또한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위에서 보란 듯이 자행되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들을 어디까지 참아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현 세태가 암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새 그들에게서 비롯된 분노가 나에게로 옮겨오더니 소심하고 이기적인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박완서의 수필 제목이면서 김수영의  시, 첫 구절이기도 한 이 문장이 생각난 건 이 때문이었다. 비교할 순 없지만 시인이 느꼈을 그 비루함의 감정이 오늘, 우울한 내 마음 위로 절절이 내려앉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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