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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Jan 16. 2023

나는 명절이 싫다(2)

이제는 진정 변화가 필요한 때...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설날이 눈앞에 닥쳤다.

시간은 마치 도돌이표처럼, 혹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1년 단위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를 제사상 앞에 데려다 놓는다.


 근래 들어 20년 이상 해온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 차리는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점점 더  힘겨워지는 현실직면하자 큰맘 먹고  제사상의 혁신을 주장해 왔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다시 돌아온 명절 앞에선 심각했던 나만 빼고 다들 남의 일인 양, 무슨 일이 있었냐며 마치 그 부분의 기억만 도려내어 삭제당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들처럼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다반사였다.

거기엔 이 시기만 되면 유독 남의 편을 자처하는 남편이 버티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 의견을 거의 다 들어주는 사람 좋은 나의 편인 남편이,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유달리 묵비권을 행사하며 묵묵부답으로 응해서 명절시기가 도래하면 으레 감정싸움이 잦아지곤 했다.


 하지만 생각뿐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건, 어쩌면 나로부터 기인함이 컸는 지도 모른다. 남편이야 어려서부터 익히 보아온 당연한 일들이라 자기 에서 무 자르듯 잘라 없애버린다는 것이  자신의 부모와 조상에게 무슨 불경스러운 죄를 짓는 듯한 마음에 저어했을 것이다.

 

 나 또한 말뿐이지 정작 보수적인 교육의 피해자로, 선뜻 그 일을 주도적으로 저질렀다가 책임추궁이나 비난을 덤터기로 뒤집어쓸까 봐, 겉으로 드러나는 강한 논조에 비해 심장 연신 콩닥거렸는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는 시류에 휩쓸리거나 개인적인 감정에 치중하기보다 명절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재정의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난 직접 네이버에서 명절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

 또 다른 곳에선 명절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오랜 관습에 따라 해마다 일정하게 지켜 즐기는 날.

 

 명절이란 일정하게... 즐기는 날...이었다.

그동안 일정한 날, 그 하루를 위해 그날이 속한 한 달을 몽땅 갖다 바치면서도 난 전혀 즐겁지 않았다. 가족 내에서 어느 누구 하나의 희생에 의한 즐거움이란 다수에 의한,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암묵적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나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모두가 즐겁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의 희생은 막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 자식 세대까지 득 보다 실이 많은 감정싸움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우리 대에서 정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는 칼을 뽑아 들어야 했다.


 난 남편에게 말했다. 명절에 나도 즐거워지고 싶다고...

물론 내가 하기 싫고 귀찮아서 그런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나도 노력하겠다고... 서로가 즐거워지기 위해...


 사람을 좋아해 지인들을 초대해 뭐라도 해먹이고 싶어 하는 지만 유독 시댁 식구들은 아직까지 편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사이가 나쁘지 않아 막상 만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만나기 전까진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그 원인이 대체 뭘까?


 물론 시댁이 어려운 건,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집에 시집와 홀시어머니와 거의 동거동락하며 지낸, 짧지 않은 나의 결혼 생활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뿌리는 우리가 나고 자란 환경 속에 녹아든 오백 년 이상의  유교 문화 속에서 미묘하게 자리 잡은 모종의 권력관계가 교육을 통해 무의식 중에 반복, 강화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유추해 본다.


 이번 설엔 아무래도 내가 먼저 서야 할 것 같다.

기제사는 차치하더라도 명절만이라도 나 자신부터 즐거워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핏줄이 아닌 남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곤 하는데 그나마  안 되는 혈육에게 1년에 두세 번 밥 해 먹이는 게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명절 차례상부터 손보아야 했다. 형식적인 건 다 생략하고 우리 식구들이 맛있게 한두 끼 먹을 수 있는 것 위주로 메뉴를 정하고 상에 올린 후 즐겁게 먹는 걸로...

 따지고 보면 나의 품은 하나도 줄지 않고 오히려 특별식을 준비하느라 몸은 더 고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향하는 방향이 옳다면 그에 따르는 어려움은 어떻게든 극복해 나가는 게 우리 인간의 지난한 역사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난생처음 맏며느리 자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맏며느리이기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는 일이니 어떻게 보면 나 역시 보수적인 유교문화의 수혜자가 아닐까?


 어떤 문화나 전통이든 좋은 점만 있다거나 싫은 것만 나열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필요에 따라 시대와 상황에 맞게 변화 발전시키되 그 기준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될 수 있으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방향...

  

  이제는 진정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자신이 즐거워지기 위해서라도 난 이번 설날부터 이 방향으로 과감하게 한 걸음 내딛기로 결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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