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BC2000년~BC1200년) 유리한 지리적 위치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차후 찬란한그리스 문명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미노스(미노아)문명을 잉태한 곳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신화로만 존재했던 크레타문명은 1900년대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에 의해 크노소스 궁전 터가발굴됨으로써 신화에서 역사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미노스 문명 속 신화는 팩트일까?
1. 제우스와 에우로페(Europe) 그리고 미노스
루벤스의 <에우로페의 납치>
바람둥이 제우스는 페니키아 공주인 에우로페에게 반해 아름다운 흰 소로 둔갑해 그녀를 유혹한다. 유혹에 넘어간 에우로페는 흰 소 등에 태워진 채 크레타섬으로 건너가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후아들 셋을 낳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미노스였다.
당시 크레타섬의 왕이었던 아스테리오스는 에우로페와 결혼함으로써 그들을 의붓아들로 받아들인다. 왕이 죽자 세 아들은 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게 되는데, 이때 미노스는 포세이돈에게 아름다운 황소를 부탁하게 되고 자신이 왕이 되면 그 소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왕이된 미노스는 그 약속을 어기게 되고 포세이돈은 분노한다.
2. 파시파에와 미노타우로스
파시파에와 다이달로스
화가 난 포세이돈은 마법을 걸어 미노스의 부인인 파시파에가 그 황소를 사랑하게 만들고, 욕정을 못 이긴 그녀는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암소 모양의 통을 만들게 한다. 결국 황소와 사랑을 나누게 된 파시파에는 그 유명한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를 낳게 된다.
3.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미노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라비린토스)에 가두고, 매년(때로는 7년, 9년) 아테네에서 제물로 온 남녀 7명씩을 미궁 안에 넣어 잡아먹게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미노타로스를 처치하러 가게 된다. 수려한 용모의 테세우스에게 한눈에 반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는 다이달로스에게 간청해 미궁에서 살아 돌아올 방법을 알아내고 테세우스에게 실타래와 칼 한 자루를 건네며 자신을 아내로 삼을 것을 약속받는다.하지만 괴물을 무찌르고 아리아드네와 함께 그리스로 향하던 테세우스는 중간에 정박한 낙소스 섬에서 잠든 그녀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문명과 관련된 위의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일까? 물론 대부분이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1900년대에 에반스가 크레타섬에서 크노소스 궁전 터를 발견하기 전까진.
발굴된 궁전의 웅장함과 유물, 벽화등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들을 통해 우린 신화가 품고 있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해양무역으로 부를 쌓은 크레타섬사람들이 소를 매우 신성시하는 민족이라는 것은미노스 문명 여기저기에서 유독 소가 많이 등장하는 걸로 알 수 있다. 그 절정에 미노타우로스가 있었다. 아테네에서 해마다 제물을 바쳤다는 것으로 보아 괴물로 대변되는 미노스왕의 세력이 크레타 섬을 벗어나 그리스 본토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를 대표하는 테세우스에게 그 기세가 꺾이면서 크레타가 누렸던 패권은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게 된다.
실제로 BC2000년에 가장 번영을 누렸던 크레타문명은 BC1450년경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크레타문명이멸망하게 된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그리스 본토에서 일어난 미케네 문명이 쳐들어와 멸망했다는 설. 둘째, 우리가 흔히 산토리니로 알고 있는, 크레타와 100km 남짓 떨어져 있는 티라(또는 테라) 섬의 엄청난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와 쓰나미로 인한 것이다. 실제 이 두 섬은 하나였는데 화산폭발로 인해 둘로 나누어졌다는 설도 있는데 그 시기, 화산폭발에 대한 기록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미노스왕 때 가장 번성했던 크레타문명은 화려했던 그 업적을 그리스 본토에 넘겨주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