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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Mar 15. 2023

무용한 책 읽기를 위한 초라한 변명

우연히 깨달은...내가 책을 읽는 이유.


 지난 일요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다음 날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단다. 올 3월의 시작은 제법 쌀쌀했던 여느 해 3월과는 달랐다. 연일 완연한 봄날씨로 사람을 미혹하더니.. 그럼 그렇지... 이렇게 한 번쯤 심술을 부려 줘야 3월이지 싶었다.

 봄을 그리 쉽게 내어주기엔 뭔가 밑지는 듯 아침부터 내리치는 빗발과 가끔씩 들려오는 바람의 포효소리에 난 매일하던 만보 걷기도 포기한 채 집 밖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침대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하루종일 책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요즈음 몇 년 동안 마구잡이식으로 읽어왔던 서양사를 정리할 요량으로 브런치에 서양사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와 유럽사로 이어질 흐름을 염두에 두며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시발점인 크레타에 이어 미케네 문명에 관한 글을 쓴 직후였다.

 한 편으로 끝내기엔 너무 풀어내고픈 내용이 많아서 그 뒤로 몇 편을 더 이어 쓸 생각이었는데, 미케네 시대를 배경으로 일어난  유명한 사건들 중 트로이 전쟁의 일부를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다음 글감으로 낙점되었다.

 

 전에 읽긴 했지만 글로 쓰려니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며칠 전 도서관에서 새로운 버전의 책을 대출해 와 읽고 있던 중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형태를 산문식으로 바꾼 버전이었는데 그나마 배경지식이 있어서인지 글쓴이가 맛깔나게 잘 엮어서인지 소설처럼 술술 읽히며 마치 무협지를 읽는 듯 재미까지 더했다.


 방에서 책을 읽으며 꼼짝도 하지 않는 엄마가 궁금했는지  얼마 전 서울생활을 접고 집에 내려와 있는 둘째가 은근슬쩍 다가와 힐긋거리더니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왜 이런 책을 읽냐고.. 요즈음 누가 이런 책을 읽는다고...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읽는다는 나의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소리를 해대는 폼이 마치 꼬투리를 잡은 어른행세다. 평소 자기가 당한 걸 이참에 복수라도 할 심사인가... 

사람들이 흥미 있어하는 걸 읽고 써야지.. 그러니까 1년이 다 되어가도록 구독자가 늘지 않지...

 평소 무심결에 내뱉은 나의 푸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지 엄마의 글엔 관심도 없던 녀석이 급기야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상관없다고. 남이 흥미를 가지는 것엔 내가 관심이 없는데 어떡하라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쓸 거라고...


 대꾸하다 말고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무용한 책 읽기를 위한 무슨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그에게 아내를 빼앗겨 전쟁까지 불사한 스파르타왕 넬라오스의 결투를 승인하기 위해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그리스 진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을 만나러 가는 장면을 읽고 있었다.


 난 아들에게 말했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다고...

아들 파리스가 야기한 국가적 재난 상태에서도 결코 아들을 탓하지 않고 전쟁의 화근이라 할 수 있는 헬레네에게도 그 어떠한 원망이나 질책 없이 따뜻하게 며느리로 받아들였던  프리아모스왕... 책의  마지막 부분에선 장남 헥토르의 시체를 찾아오기 위해 몸소 적진을 찾아 아들 연배의 적장 아킬레우스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절절한 부성애를 호소해 아킬레우스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비록 한 나라의 왕으로선 부족할지 몰라도 아비로서 보여주는 그의 부성애는 자녀를 가진 부모뿐만 아니라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엔 충분했다.


 난 프리아모스왕 얘기를 들려주며 과장을 섞어 짐짓 심각하게 얘기했다.

다양한 책을 읽으며 여러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너를, 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너를 나의 소유물로 생각해서 너의 생각 따윈 념치 않고 내 의견만 고수했을 지도... 책을 읽으면서부터 엄만 너의 생각을 존중하고 너를, 더 나아가선 타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의 비약에 아들은 더 이상 건드리면 자기가 불리해지리라는 걸 감지했는지 강한 긍정도, 그렇다고 강한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슬쩍 꼬리를 감췄다.


 돌아서는 아들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도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내가 너를 이해하는 방식이 맞기는 한 건지... 내가 읽은 숱한 책들을 제대로 이해는 한 건지...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을 안으로 꿀꺽 삼키며 시선을 다시 [일리아스] 속 프리아모스왕에게로 돌렸다.

어쩌면 왕이 파리스를 크게 벌하여 헬레네와 함께 쫓아냈더 라면 자신의 나라와 백성은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때때로 부는 소소한 바람에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어내야 나의 심지는 정처없는 부유를 멈추고 한 곳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난 책장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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