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휴대폰 약정은 2년으로, 계약대로라면 작년 이맘때쯤 끝났어야 했다. 결합으로 더 큰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판매원의 말에 혹 해서 그만 TV와 인터넷까지 3년으로 묶은 게 화근이었다.
그 당시엔 돈에 눈이 멀었는지,그깟 1년이 대수롭지않게 여겨졌는데, 2년이 끝나자 마음이 달라졌다.
이미 바닥을 보았지만헤어질 빌미를 찾지 못해 지리하게 이어지는 연인 관계마냥 차마 말로는 못하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즈음, 터무니없는 통신 요금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거대 통신사들의 독점 체제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소식을 매스컴에서 접한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렇게 1년을 더 끌고 나서야 뒤늦은 메이저급 연인의 질척거리는 추파를 애써 차단함으로써, 불합리한우리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이 참에 그동안 말로만 듣던, 이름 그대로 요금이 알뜰하다는, 알뜰 휴대폰으로 갈아타기로 했다. 쓰는 양에 비해 턱없이 많은,기십만 원의 통신비를 감당해야 하는 호구짓에서 이제는 그만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생활비에 있어서는 조목조목 따지는 편이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심신이 지쳐 이것저것 따질 여력도 없었고, 대부분자동이체로 걸어놓은 채,그저 무심하게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어쩌다 한 번 들여다보는 시기라곤, 약정이 끝나서 다른 걸로 갈아탈 때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마음먹고 정리하려고 덤벼들었다가도 알 수 없는 외계어들로 쓰인 것 같은 항목들의 나열로 일찌감치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벌이가 없는 지금이, 생활비 다이어트에 돌입할, 가장 절실하고 절박할 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놓고 씀씀이를 줄이려고 쳐다본 생활비 목록에서는 알게 모르게 빠져나가는 돈이 많았다. 우선새는 돈부터 잡아야 했다.
작년엔 오랫동안 벼르던 보험을 손보았다. 몇 년 전, 최소한의건강보험과 암보험을 취사선택해서 정리한 이래, 때마침20년 동안 부은 우리 부부의종신보험이 끝나자 부담이 한결 줄었다.
하지만 늘 구멍이 있기 마련, 5년마다 갱신되는 실손보험이 복병으로 떠올랐다. 처음엔 남편것과 합해 저렴하게 잘 가입했다고 생각했는데,10년이 지나자 금액이 2배로 뛰더니, 15년째인 재작년엔또다시 2배로 뛸 거라는 예고장을 접하면서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아직까진 병원 문턱 넘는 일이 드문 우리에게, 처음에 비해 4배로 뛴 보험금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 큰 부담이었다. 그것도 둘 다 실업인 상태에서...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실손 보험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연일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실정이라 큰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수년간의고민 끝에,15년간 부어온 실손보험 중에서 건강보험 부분을 제외한, 갱신비율이 높은 실손 부분(입원, 통원비)을 해지하고 새로 바뀐 4세대 실손 보험으로 갈아탔다. 물론, 보험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어찌 됐던 지금은월지출을 줄여야 할 때라 과감하게 결정했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이번은 통신비 차례였다.
요즈음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경쟁이 치열해진 알뜰폰 시장에서, 나에게 맞는 요금제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우린 근 한 달을 고심하다가 그래도 알뜰폰계에서 메이저급이라 할 수 있는 곳을 골라 번호이동으로 통신사를 갈아타기로 했다. 휴대폰 파손이 심했던 작은 아들 것만 당근을 이용해 자급제폰으로구입하고, 나머지 가족은 기존의 휴대폰을 좀 더 쓰기로 했다.
온종일 알바로 바쁜 작은 애는 편의점에서 유심을 사서 셀프개통을 하기로 했고, 큰아들과 우리는 서류를 작성하고, 신청한 유심을 택배로 받은 후,바로 갈아 끼우면 개통이 끝나는 서비스를 신청했다.
5월은 취업교육과 알바등으로 가족 모두가 바쁜 탓에, 온 가족이 알뜰폰으로 갈아타기까지, 꼬박 일주일 정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처음이라 생소해서 서류작성 시 오류가 발생하거나 해피콜 통화가 어긋나는 등 저마다 버벅대느라 나름 힘든 과정을 보냈다.
어느새 6월, TV와 인터넷도 결합 없이 좀 더 저렴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갈아탔고, 휴대폰 번호이동도 무사히 끝낸 상태다. 이왕 하는 김에 제휴카드도 신청해서할인까지 받으니, 통신료가 몰라보게 다이어트되었다.
무엇보다 진실을 가리던 거대한 거품이 확 줄어든 것 같아 기분 또한 가벼워졌다.
난 항상 생각해 왔다.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물론 이전의 나처럼, 모든 것을 아끼는 수전노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불필요한 것은 최대한 절약하고 줄이면서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곳에 투자하라고 아이들에게 잔소릴 해대곤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지만 타고나지 않았다면, 끊임없이 익히고 연습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하루,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이러한 작은 습관들이 어느새 나를 나답게 살도록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며, 방패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걸,나 또한 체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