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개인사들로 바빴던 탓에 그 열기를 뼛속 깊이 느끼지는 못했지만, 나 같은 미련퉁이도 에어컨 없이단 한순간을 버텨내지 못한 걸 보면 분명 예사 날씨는 아닌듯했다.
추석까지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가 10월 들어 오락가락하더니 내어 놓지 않을 심사인 듯 품고 버티던 '가을'을 결국 토해내고 말았다.
여름에 그렇게 부려먹고도, 또 그만큼 긴 겨울에 써먹으려면 이 정도의 배려는 허락해야지... 마지못해 큰 선심을 쓰는 악덕 사업주처럼 자연은 가을이라는 숨 쉴 구멍 하나를 적선하듯 던져주었다.
점 점 그 기세를 떨치는 이상기후 때문에 혹시 가을이 소멸한 건 아닌지 의구심으로 불안할 즈음, 기어이 오고야 말 손님처럼 가을은 그렇게 홀연히 찾아왔다.
하여, 내마음은 이제 겨우 입추에 들어섰는데, 가을을 채 맞이하기도 전에 겨울이란 놈이 저만치서 아가리를 벌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설핏눈에 보이는 게 아닌가.
덕분에 마음이란 놈이 더 바빠졌다. 앉은자리가 미처 따뜻해지기도 전에 곧 떠나야 할 손님이란 걸 알기에 이리저리 눈에 담고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난 주말이면 싫다는 남편을 끌고 동네 인근 지역을 헤매며 놓친 가을은 없는지 술래잡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특정한 목적지 없이 지난번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보기로 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동네 거리를 벗어나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는 4차선 오른편으로 샛길이 하나 보였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를 피하며 샛길 안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의외의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를 타고 대로를 달릴 땐 눈에 띄는 게 무채색 공장들 뿐이라 산업단지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속에 이렇게 자그마한 마을을 품고 있을 줄이야... 저마다 크고 작은 밭들을 끼며 단층 또는 복층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보니 영락없는 옛날 농촌 마을 풍경이었다.
몇 집을 제외하고는 텃밭 수준으로 이것저것 여러 가지 작물들을 키우고 있어 예상치 못한 장난감을 선물을 받은 듯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석류와 가지
무와 사과
호박
무화과
가지와 무, 파와 호박등 우리가 흔히 먹는 채소에서부터 사과, 석류, 무화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크기나 발육상태로 보아선 상품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고 그저 소량으로 재배해 자급자족하거나 이웃이나 친지와 나눌 정도의 것인 듯했다.
흔한 주말농장조차 해 본 경험이 없는 도시 촌놈인 나는 이렇게 다양한 작물들이 지척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동안의 노고를 직접 치른 농부인양 볼품없는 모양새와는 상관없이 그 결과물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남편은 무엇 하나 놓칠세라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나를 더 신기해했다.
깻잎과 들깨
그런데그중에서 특히 나의 눈과 코를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마을 초입을 지날 때부터 마치 마른 잔 나뭇가지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여기저기 듬성듬성 쌓여있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때마침 펼쳐놓은 넓은 천 위에서그것들을 털고 있는나이 지긋한 한아주머니를보았다. 내리칠 때마다사방으로 퍼져 내 코끝에 와닿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나서야 그것들의 정체가들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근처에 깻잎들을 참 많이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무언가 깨달음의 섬광 같은 것이 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흔히 먹는 깻잎이 깨의 잎 부분? 그리고 그 씨가 바로 이 냄새의 근원인 들깨?
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느라 열일하던 휴대폰을 잠시 고쳐 잡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남남으로 지내다 이제 막 상봉한 가족이 친자를 확인하듯 들깨와 깻잎 간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느라 내 두 눈과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근 50여 년 만에 알게 된 사실... 이러한 상식을 이제껏 몰랐다는 걸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슨 위대한 발견을 한 것처럼 신이 난 나는 연신 유레카를 외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잘라 그 주에 집에 들른 큰아들을 붙잡고 잔뜩 흥분한 채 나의 무식함의 재발견을 떠벌리기까지 했으니...
내가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한 건 사실 얼마되지 않았다. 아마 앞만 보고 달리던 일상의 속도에 지쳐 자진 안식년을 선택했던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브런치를 시작한 때와도 거의 맞먹으니 횟수로 치자면 만 5년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변명 같지만 이렇게 둘러대고 보니 나의 무식함이 영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난 자연에 관한 한 채 5살이 되지 않는 수준인 것이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나름의 장점도 없진 않다.
자연을 대할 때면 어디에 숨었다 나왔는지 사라진 줄만 알았던 호기심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얕은 상식일지라도 알면 알수록, 몸으로 체험하고 오감으로 느낄수록 자연이 새롭고 신비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5살 아이의 눈이든 노년기를 앞둔 중년의 시선이든 그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당분간 나의 자연 탐색은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