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소설(2)
"여보, 내일부터는 야채위주로 차려줘..."
내가 잘못 들었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남편은 결혼한 이래 밥상 위에 육류가 없으면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입맛만 다실뿐, 영 진도를 못 내는 스타일이었다. 반찬 타박은 하지 않았지만 고기 흉내를 내는 가공식품 쪼가리라도 있어야 적극적인 자세로 식사에 임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건강에 신경 좀 쓰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살 놈은 어떻게든 살고 죽을 놈은 죽는다며 마음 편하게 먹고 싶은 건 먹고 살 거라며 장성한 아들들도 부리지 않았던 응석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모양이다. 그날 저녁엔 갓 볶은 돼지불고기의 달큼한 냄새도 외면한 채, 김치와 나물 몇 가지만 줄타기하던 남편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얘들도 없는데 남은 잔반은 또 내 차진가 싶어 퉁명스럽게 식탁을 정리하려다 보니 남편의 밥그릇이 채 반도 비지 않았다.
더 먹겠다는 건지, 다 먹었다는 건지, 식탁에선 먹는 것에만 열중하던 그가 오늘은 참 유별나다 싶어 한 소리하려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석만이가 암에 걸렸데..."
텅 빈 듯한 눈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대장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래... 1년도 장담 못 한다지, 아마..."
석만이면 몇 년 전에 은퇴하고 요즘 부쩍 자주 어울리던 남편의 고교동창 멤버들 중 하나였다. 명퇴든 권고사직이든 폐업이든, 육십을 앞두고 연이은 실업 상태에 직면한 몇몇이 함께 소일거리라도 찾자며 모임이라도 결성한 모양인지, 남편은 직장을 다닐 때보다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는 날이 더 잦아졌다.
"회사 다닐 때 형식적인 건강검진만 했는지 못 잡아냈다지.. 은퇴하고 처음 했다니, 한 3년 만인가?"
그것도 이번에 경비로 취직한 데서 필요하다고 해서 받은 검진이었단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대장암. 남편은 오늘 그 친구 병문안을 다녀온 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함께 간 친구 중에 몸관리 잘하기로 유명한
동훈 씨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는지 다음 주부턴 서넛이 같이 운동도 하고 식단조절도 병행하기로 했다니 내 입장에선 입 아플 일이 하나 준 셈이다.
며칠 시무룩해있던 남편은 친구들과 운동을 다니면서 점차 규칙적인 리듬을 찾아갔다. 오전 일찍 헬스장을 출퇴근하고 한 달에 한두 번은 인근 산을 돌며 친목을 다지는 듯했다. 점심을 먹고는 각자 구미가 당기는 걸로 노후 준비를 한답시고 돋보기까지 껴가며 열공 중이다.
부동산중개인이며, 주택관리사, 전기기사등 무엇에 도전할까 한참을 고민했다며, 백만 원에 달하는 전기기사 자격증 과정을 결제하고 온 날, 남편은 시장 좌판에 펼쳐놓은 과일 고르듯 선택만 하면 자격증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거기다 할인을 해서 엄청 싸게 샀다며 두꺼운 수험서 서너 권이 든, 꽤 무게가 나가 보이는 상자를 들고 와선 자신의 현명한 소비를 자랑질까지 하는 모습에 난 기함을 토할 지경이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석만 씨 병문안도 가끔씩 가는 눈치였다. 그런 날이면 의기소침해 있다가 다시금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운동에 더 열의를 보였다.
단백질도 적당히 섭취해야지. 새로 시작된, 이전과 영 다른 방향의 내 잔소리에 머쓱해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저울질만 하던 남편의 젓가락은 육류 근처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자신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고기에 진심이었던 석민 씨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얼이 반쯤 빠진 채, 밤늦게 귀가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재차 물어도 영 묵묵부답이었다. 평소 어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말을 아끼는 성격임을 알기에 더 이상 다그쳐 묻지 않았다.
그 날이후 남편은 식사도 거른 채, 새벽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 며칠째 반복되었다.
오늘은 기어이 그 이유를 알아내고 말리라. 나흘쯤 지나자 걱정을 너머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 나는 그와 한바탕 하리라 단단히 벼루고 있었다.
그날따라 초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어온 그의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한 개씩 들여져 있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식탁에 앉자마자 남편은 비닐봉지 속 물건을 차례로 꺼냈다. 소주 세 병과 족발, 보쌈, 닭튀김까지, 잔치라도 벌일 모양인지 음식을 펴놓더니 나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소주와 음식을 걸신들린 듯 먹어대기 시작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소주 한 병을 비워갈 무렵, 입안 가득 고기를 물고 우걱우걱 씹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며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동훈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 병문안 갔다 오던 중에...
중환자실로 옮겨졌는데... 오늘 죽었어...
에이 씨.... 살 놈은 어떻게든 살고 죽을 놈은 죽는다고... 나 그냥... 먹고 싶은 거 먹고,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야...
난 그 어떤 잔소리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