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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Jul 24. 2022

해파랑길 2코스를 걷다.

기장 대변항에서 해동 용궁사까지

 

 퍼붓듯  쏟아지는 폭염으로 하늘에 해의 잔상이 남아있는 한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낼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우린 불문율처럼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움직이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갈만한 곳을 검색했다.

제한된 공간에서 붙어지내다보면 어떤 이유로라도 서로에게 뾰족해진다는 걸 알기에 공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거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는 피해야 한다는, 우리 나름의 궁여지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근 3개월 이상 만보 걷기를 지속하고 있던 내가 걷기에 탄력이 좀 붙은 걸 안 남편은 요즘 내 관심사인 해파랑길을 들먹이더니 이번엔 지난번에 미처 다 걷지 못한 파랑길 2코스의 나머지 길을 걸어보자고 제안해왔다.

마음은 동했지만 더운 날씨에 선뜻 그러자고 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지난번 해운대에서 해변열차를 탔을 때처럼 오후에 출발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해파랑 부산구간인 1코스~4코스

  총 50코스로 이루어진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 끝나는 약 750km 대장정의 걷기 길이다.

마지막 50코스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니 걸을 수 있는 로 치자면 총 49코스의 여정이라 하겠다.


 그중 부산 구간에 속한 4코스 중  2코스는 해운대 미포에서 출발해 송정을 거쳐 기장 대변항까지, 약 17km에 이르는 길이다.

우린 지난번에 해운대에서 해변열차의 코스와 겹치는 미포~송정에 이르는 구간을 걸어봤기에 오늘은 송정에서 대변항에 이르는 그 나머지 길을 걸어보기로 하고  출발지를 반대편인 대변항으로 잡아 오후 2시 반쯤 집에서 출발했다.


 기장으로 가는 길의 거의 삼분의 이가 해운대 가는 길과 겹치므로 교통체증이 만만찮았다. 거의 세 시간 만에 기장 대변항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대변항에 세워놓고 더듬더듬 해파랑길의 흔적을 찾아 도보를 시작했다.

군데군데 지도와 표식이 있어 네이버 지도 앱과 병행하며 걸어가던 중 해동 용궁사까지 5km 걸린다는 안내판을 보고는 일차 목표를 용궁사로 잡아 해안 도로로 걸어갔다.


오랑대

 부두에 빼곡히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과 회와 해산물을 파는 횟집들, 그리고 즐비한 천막을 친 노점 가게들을 지나자

어느새 깔끔하게 단장된 길을 따라 고즈넉한 바닷길이 펼쳐졌다.

그리고 저만치서 바다 깊이 움푹 들어서 솟아있는 커다란 바위산 위에 작은 사당 같은 건물이 시선을 끌었는데 사진작가들도 뷰 명당으로 자주 찾는다는 오랑대였다.


 유배 온 지인을 찾아왔다는 다섯 친구가 술을 마시며 노닐었다는 오랑대는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어떻게 저런 자리에 건물을 짓고 풍류를 즐길 생각을 했을까?

요즘 세대들이 경치 좋은 카페를 찾아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탁월한 안목과 유배지에서조차 발휘되는 흥취의 DNA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오랑대를 지나자 소나무로 둘러싸인 시원한 오솔길이 이어지는 가 싶더니 그 길의 끝에는 또 다른 느낌의 바다 풍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업으로 부산한 대변항의 바다와는 달리 사람의 흔적이  덜 묻어나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 서로 닮은 듯 결코 같지 않은 푸른빛을 머금은 바다와 하늘의 조화가 마치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 넋 놓은 시선을 한동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난티 코브앞 바다

 그런 풍경에 취해 바다에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시선을 마치 강제로 잡아채기라도 하듯 바다 맞은 편의 웅장한 건물로 눈길이 저절로 옮겨졌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 아난티 코브.

꽤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해안선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게 즐비한  건물들... 그 멋진 바다를 온통 휘감으며 위풍당당하게 바다를 마주한 채 우뚝 서 있었다.

하나의 마을, 아니 바다를 오롯이 독차지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자기만의 제국을 형성한 듯 자신만만한 기세는 그 앞을 지나는 초라한 나그네로 하여금 남의 땅을 몰래 밣고 지나가는 것처럼 주눅들게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아난티 코브를 뒤로 하며 그 아름다운 우리의  자연이 왠지 그들만의 자연으로 둔갑한 것 같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준 것은 저 멀리 보이는 해동 용궁사의 빼어난 자태였다.


해동 용궁사

 결혼을 하고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방문한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거의 20년 만에 해동 용궁사를 다시 찾은 셈이다.

바다를 품은 절, 해가 가장 빨리 떠오르는 곳.

용궁사는 여전히 신비하고 아름다웠지만 첫 방문의 여운이 너무 인상 깊었던 탓인지 오늘따라 왠지 그 규모가 소박해 보였다. 하지만 바다와 한 몸인 듯 절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그 경치는 마치 그 이름처럼 바닷속 용궁을 그대로 옮겨 놓은 자타공인 우리나라 절 중  단연 으뜸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해안로를 따라 용궁사로 왔기에 돌아 나오는 길은 반대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절을 호위하듯 즐비하게 늘어선 사람 크기의 12지신 상들이 보이는 입구에 다다르자 우린 다음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잠시 머리를 맞대었다.

얼마 남지 않은 송정 해수욕장까지 계속 걸어갈지 차를 주차해 놓은 대변항으로 돌아갈지... 

7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일단 더운 날씨와 허기진 배를 감안하고 답사차 온 취지를 떠올리며 욕심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우선 밥부터 먹고 버스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기장 대변항 야경


 근처 식당에서 고등어조림으로 배를 채운 후 소화도 시킬 겸 한두 정거장만 걷는다는 것이, 든든한 배와 시원한 밤바람의 꼬드김에 빠져 그만  목적지인 대변항까지 걷고 말았다.

밤바다의 아름다운 야경은 기꺼이 고행을 선택한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선물이었다.


 더운 날씨에 왕복 10km를 걸으면서도 이상하게  우린 힘들지 않았다.

왠지 걸을수록 우리 몸속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에너지가 우리의 열기에 놀랐는지 조금씩 조금씩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꾸준한 걷기의 힘인가?

오늘, 우린 왠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해파랑길 도전에 대한 희망을 엿본 같아 걸음에 더욱 힘을 실었다.

어느새 태양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달빛이 시원한 바람을 대동하며 우리의 앞길을 고즈넉이 비춰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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