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여전히 진행중인 우리네 교육현실

by 정현미

얼마 전 브런치에 올라온 서평을 읽고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다시 읽게 되었다.

학창 시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반드시 해야 할 통과의례처럼 헤세의 책들을 애써 찾아 읽곤 했었다.


1~2년 전이었던가?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문구나 상징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한번 읽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머리는 여전히 백지상태였다.

이번 책 '수레바퀴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읽은 책인데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번잡하고 사소한 생활의 부스러기들로 잠식당해 소위 고상한 고전이 버틸 자리가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적자생존'이라 했던가, 기록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우스갯소리에서 번뜩이는 진리를 찾은 양 이제부터라도 읽으면 쓴다는 원칙을 적용해 보기로 했다.

물론 다 읽고 나면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강박에 마지막 페이지 넘기기가 두려워지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한 번씩 꺼내 읽으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신기함을 경험한 후론 힘들지만 리뷰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레바퀴 아래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아이가 권위적이고 획일화된 교육제도하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헤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유달리 교육열이 뜨거운 우리에겐 누구나 공감하는, 어떻게 보면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너무나 식상한 소재라 애써 외면하려 했던 마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 한스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형성하기도 전에 이미 짜여진 기존 사회와 어른들의 통념에 의해 길들여지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쏟아내는 의문을 억누르며 현실을 자신의 숙명인양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애써 억누르고 있던 나의 마음 또한 그에 대한 측은지심을 넘어 예의 그 알 수 없는 분노로 치닫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오늘날 선진적인 교육제도로 여러 나라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독일에서조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당시의 고루하고 권위적인 학교를 비판한 작품들이 많이 쏟아졌다고 하니, 이러한 혹독한 과정이 인류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어느 사회나 겪게 되는 보편적인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현재의 독일처럼 우리 또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자그마한 위로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돌려 마주한 우리네 교육 현실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층 달아올라 절정에 치달아 있는 모습에서 기껏 고무되었던 나의 마음이 모래성처럼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헤세 작품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내면의 갈등이 상반된 두 인물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한스와 친구 헤르만 하일너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 갈등이 표출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자신이 나고 자란 편협하고 속물적인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막연히 평범하고 하찮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공부만 했던 한스와는 달리, 하일너는 수도원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표현하는 힘과 용기를 가졌고 시와 상상력으로 자신의 영혼을 노래하며 비록 퇴학을 당할지언정 주위에 환경에 굴하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독실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 장래가 촉망됐던 작가, 헤세는 지독한 실패와 방황 끝에 신학교를 자퇴하고 시계수리공이나 서점의 수습사원을 거치면서도 시에 대한 열정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소설 속 한스와 헤르만 하일너라는 인물 속에 교차하며 잘 녹아있었다.

신학교의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분위기와 자유분방한 친구의 영향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던 한스는 결국 신경쇠약으로 수도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한스는 어릴 적 놀이터였지만 공부에 매진하느라 오랜 기간 발길을 끊었던 고향의 자연에서 잠시 위로를 받기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달라진 자신의 처지에 체념한 듯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또한 한스는 잠깐 동안의 풋사랑에 낙담하기도 하고 기계공 견습생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해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술에 취한 채 물에 빠져 숨을 거두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오히려 순수하고 영특했기에 주위의 기대와 관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소소한 즐거움까지 포기한 채 최선을 다한 한스, 이제껏 우린 영화나 드라마,책등 주위에서 너무나 많은 한스들을 봐왔기에 곧 잦아들 순간적인 연민 이외에 다른 감정은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초기에 고수하려던 냉정함을 잊은 채 자꾸 한스 곁으로 달려가 짧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솟아났다.


이제 학생이 아닌, 부모의 입장에서, 그러한 환경에 알게 모르게 기여한 부끄러운 한 어른으로서 그의 마음을 다독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고 싶었다.

결말을 몇 장 남겨놓지 않고도 여전히 해맑아 보이는 한스를 보며 나는 파국을 알면서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 같은 희망을 찾으려는 듯 페이지 넘기기를 자꾸 주저했다.


이제는 어른들이, 부모들이 나설 차례다.

그동안 많이 속아오지 않았던가...

그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아이들을 얼마나 더 쥐어짜야 하는가...

또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또 얼마나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지금도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한스의 죽음이 술에 취한 실족사인지 자살인지 끝내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한스의 죽음에 온 마을, 온 사회, 온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그러나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그 어떠한 질책도 받지 않은 그들은 한스를, 한낱 흔한 패배자로 치부하며 애도하는 척하다가 이내 일상으로 돌아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위 그들의 사명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아직도 현재 진행중인 우리네 참담한 교육현실에서,

언제 깔릴 지 모르는 수레바퀴 아래의 삶에서,

우리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이야말로 진정 온 부모, 온 사회, 온 나라가 나서야 할 때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