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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Aug 17. 2022

난생 처음 법원에 가다.

나의 소심한 투쟁기

 

 벌써 7,8년 전 일이다.

남편의 회사가 서울 본사와 합쳐지는 바람에 나와 아직 손이 많이 가던  아들 둘을 남겨둔 채 남편 혼자 서울로 올라가야 할 상황이었다.

나도 한창 학원 운영으로 바쁜 처지라 모든 걸 정리하고 따라갈 수도 없고해서 우린 고민 끝에 어쨌든 기러기가족은 피하자는 생각에 남편의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그땐 학원도 자리를 잡아 남편과 함께 운영하면 그런대로 생활에 지장이 없을 거란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렇게 나의 학원에서 2년 정도 경력을 쌓은 남편은 인근의 다른 아파트에 학원을 차려서 독립하게 되었고 내가 두 학원을 왔다 갔다 병행하며 기타 제반 업무를 보조했다.


 그러기를 2년, 10년 이상의 학원 경영과 예전같지않은 경기 등으로 나에게  예의 그 번아웃이라는 것이 왔고, 우린 숨통이라도 좀 틔우자는 생각으로 학원을 하나씩 정리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때 남편의 학원을 먼저 정리하고 나의 학원과 합치는 과정에서 인수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2년 계약기간 만료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라 거의 헐값에 내놓았는데 마침 같은 층에서 태권도 학원을 운영하던 여관장이 관심을 보여 이사비 조로 100만 원만 받고 넘기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금액도 얼마 되지 않고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구두로 한 말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이사를 하고 한참이 지나도 약속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전화하자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 험한 말에 이어 전화를 받지 않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남편은 아차 싶었는지 구두로 약속한 내용을 여러 번 문자로 보내 입금을 종용했지만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답신에 무응답으로 대응하기 일쑤였다.

흔히 여느 송사가 그렇듯이 이제 더 이상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적은 금액이지만 문서로 남기지 못한 우리의 불찰이 컸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 원장의 태도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악화된 내 감정 탓이겠지만 그 뒤로 그 원장의 악행이 나 둘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이대로 좌시할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정의감 같은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학원을 인수받을 때 우린 전 원장이 요구하는 권리금 조의 돈을 한 푼도 깎지 않고 그대로 건넸다. 10여 년 자영업을 하면서 그래도 적으나마 그것이 자영업자의 퇴직금에 갈음한다는 생각에, 협상은 되 떼먹는다는 생각은 일절 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그 당사자가 순진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임에야...

그저 액땜했다 치고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될 것만 같았다. 의례 뻗대면 유야무야 넘어간다는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원장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린 법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소액이라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을 내어 법원을 들락거리며 알음알음 절차를 알아보고 고소장을 작성하기를 몇 달, 송달된 우편물을 번번이 반송 처리하던 그 원장은 쌍방이 출석해 조정하는 날에도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정위원이 전화통화로 사실을 알리자, 줄 수 없다고 버티더니 청소비 조로 20만 원을 제외한 80만 원으로 조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또한 이 일로 더 이상 시간적, 정신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그러마고 동의해주었고,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그로부터 5년, 우린 또다시 법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코로나가 좀 완화되자 묵혔던 숙제가 생각난듯 이번엔 뭔가 끝을 봐야 할 것같아 법원출입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 좀 익숙해졌나 싶지만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은 법적 절차는 영 손에 익지 않았다.

아직까지 돈을 받지 못한 우리는 다음 절차인 가압류 과정을 밟기로 했다. 간단하게나마 절차에 대한 조언은 받았지만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안내장을 읽고 인터넷을 찾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떼고, 수수료를 지불하며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신청'이라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어느덧 받아야 할 돈은, 미처 알지 못해서 누락한 소송비용을 제외하고도 세월만큼 불어난 이자로 100만 원이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 법원으로부터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이라는 특별 송달 물을 받았다.

한글이지만 해독이 쉽지 않은 우편물을 여러 번 읽고 나니 이번엔 '추심 신고'란 걸 해야 하나 보다.

낯설고 난해한 법원 우편물을 앞에 두고 기계적으로 다음 절차를 생각하는 걸 보니 이젠 제법 마음이 무뎌졌나보다.



  

 어쩌면 우린 돈을 영영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원장은 그저 솜털만큼의 무게도 느끼 지지 않는 사소한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자신의 인생관을 고수하며 잘 살아갈 것이다.

인생이란 드라마나 영화처럼 항상 공평한 것도 아니며 선인이라 보상받고 악인이라 대가를 치르는 것도 아니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고자한다.

내가 꼭 선인이라 서라기보다  나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일에 대해 귀찮아서 그만둔다는 식의 핑계로 포기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일은 법원에 '추심 신고'란 걸 알아보러 가야겠다.

그새 몇 번 봤다고 실생활에선 거의 마주칠 일 없는 '추심' 이라는 법률적 용어가 조금은 입에 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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