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사나흘 앞둔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웬만해선 잘 받지 않는데 같은 권역 내 지역번호가 뜨길래 홍보성 전화면 바로 끊어버릴 요량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뜻밖에도 법원이었다.
안 그래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송사가 있어
그 사건을 떠올리긴 했지만 굳이 법원에서 친절하게 그 과정을 확인할 리도 없고...
'혹시 박ㅇㅇ라는분아시나요?'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분이 낯익은 이름을 언급했다.
우리를 난생처음 법원으로 인도한 소송 당사자인 채무자, 그녀의 이름이었다. 몇 년 동안 꿈쩍도 않던 그녀가 나와통화하기를 원한다며 연락처를 줘도 되는지 묻는 전화였다.
그 긴 세월 동안 남편과 연락을 주고받아선지 소송 당사자로 등재되어 있던 나의 전화번호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지난 2주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받지 못한 채 넘긴 학원권리금에 대한 소송을 코로나이후 5년 만에 재개한 우리는 마지막 수단으로 은행 압류를 걸고 추심명령을 받았다.
그다음절차를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알아본 후 압류한 은행을 직접 찾아갔다.
법원에서 받은 추심 명령서를 보이며 제3채무자인 은행으로부터,압류한 통장의 돈을 직접넘겨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그 절차를 밟았다.
시간이 걸린다기에 이제나저제나 연락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할 수 없이 서류를 접수한 지 일주일쯤 흐른 지난 금요일, 다시은행을 방문했다.
사건을 접수한 담당 직원은 본인이 직접 연락해봐야 한다며 채무와 여신 관련 부서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연락한 결과, 잔고부족으로 추심명령을 실행할 수 없다고 결정이 났단다. 통장에 남은 소액의잔고라도 줄 수 없냐고 했더니 최저 생계비를 웃도는 돈에 한해서만 지급 가능하다나?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풀릴 리가...
사실 채무자가 어떤 은행과 주거래를 하는지,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린 복불복으로 하나의 은행을 골랐을 뿐이었다.
처음에,절차를 밟으면 지급이 가능하다는 은행 직원의 안내를 받았을 때만 해도 왠지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잠시설레기까지했다. 하지만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자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처음에 결심했던 그마음을접고 그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훅 올라왔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추석이라도 지나고 나서 생각하자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중에법원에서 온 전화를 받은 것이다.
곧이어 채무자인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얼마 전에 통장이 압류된 걸 알았고, 자신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노라고 했다.
압류 전에 전화라도 주시지하며 오히려 섭섭하다며 속상해했다.
줄곧 남편과 통화했기에 난 이번이 그녀와의 첫 통화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데 드릴 건 드려야죠...
그녀는 5년이 넘는 동안 내가 속으로만 삼키던 말을 너무 쉽게 뱉어내고 있었다.
그동안 코로나로 힘들었다고, 4개까지 확장했던 학원을 다 정리하고 지금은 남편과 일용직을 뛰고 있다며 그녀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털어놓듯 넉살 좋게 늘어놓았다.
그리곤 그 기간 동안 쌓여 15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싹둑 잘라 100만 원을 바로 입금할 테니 압류를 좀 해결해달라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잊고 있던 세월만큼 그 사이에 쌓인 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
하지만 난 더 이상 그녀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나머지 돈을 더 받아내고자 그녀와 또 실랑이를 하고, 궁금하지도 않은 그녀의 넋두리를 받아줄일말의 마음도없었기에 너무나 쉽게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리고 입금을 확인한 바로 그다음 날 법원으로 가서 다소 번거로운 압류해제 과정을, 그것도 수수료를 줘가며 처리해 버렸다.
마음 같아선 내가 속이 상한 세월만큼 그녀에게도 치도곤을 주고 싶었다.돈을 건네받은 지금, 나는 더 이상 '을'의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몇 년 전 그녀를 직접 상대한 남편이 왜 그렇게 쉽게 들어주냐고 날 보며 타박하려다 말고 그냥 내 맘 편한 대로 하라고 태세를전환했다.
그래... 내 맘 편한 대로... 그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돈문제로, 사람 문제로 마음이 불편하기 싫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 덕분에 난 많은 걸 배운셈이다.
간단한 거래도 반드시 문서로 남겨야 한다는 것과 무엇보다 법원이란 델 왔다 갔다 하며 소송절차라는 걸 밟아보았고
겉으로 무던해 보이는 사람도 모두 내 맘 같지 않다는 달갑지 않은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어쨌든 땅과 한 몸인 듯 꿈쩍도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반응을 해온덕분에,상처뿐인 영광일지라도 나에게소소한 승리로기억되는 경험을 안겼으니, 받지 못한 나머지 돈은 그에 대한 수업료로 갈음한다고 해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아닐것이다.
사실 난 그녀를 잘 모른다. 학원을 하는 동안 멀리서 스치듯 보았고타인에 의해 왜곡됐을지도 모르는 평판만 들었을 뿐.
나와 통화하면서 내뱉던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적너스레였는지 지금도 난 알 수가 없다.
다만 잘 나갈 땐 적은 돈에도 그렇게 오만하던 사람이 오히려절박할 때 숙이고 들어오는 모습에서 인생의 아이러니와 함께씁쓸함을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