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어머니가 해다 주신 반찬으로 저녁을 때우고 볼륨을 최대한 낮춰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아직 채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옹알거리는 민서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시각은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TV 소리 때문에 깬 거야?"
도형은 얼른 민서를 받아 안고는 함박웃음 띤 눈으로 민서를 응시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아니, 민서가 깨웠어. 배고픈지 칭얼대서 방금 젖 먹였어."
그래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민서는 옹알이를 하며 아빠의 까꿍 몸짓에 연신 까르르 댔다. 도형 또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까꿍 거리며 민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녁은 먹었어?"
푸석푸석한 얼굴로 아내가 물었다.
“어~대충 먹었어... 먹고 싶다던 족발 사 왔어, 식탁 위에 있어... 그리고 참. 우편물이 몇 개 왔던데. 관리비 고지서랑 무슨 독촉장 같던데... 관리비도 밀린 거 아니야? 두 달 치가 와 있더라구.”
"다 자동이체로 걸어놔서 미납된 게 없을 텐데..."
천천히 식탁 쪽으로 가서 우편물을 살펴보던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독촉장, 그건 뭐야? 처음 보는 건데."
“어... 별 거 아니야. 내 통장에서 출금되는 건데... 잔고가 부족했나 봐...”
잠이 덜 깬 탓인지 아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잦아들었다.
“내 통장으로 다 옮겨놔. 자기가 퇴사한 지가 벌써 일 년이 다돼가는데 잔고가 있겠어? 그리고 벌써부터 재취업 준비하고 그런 거 아니지? 둘이 벌 때보다 힘들겠지만 일단 민서 키우는데만 집중하자, 딴생각하지 말고..."
민서의 옹알이에 묻혔는지 도형은 아내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날 아내는 그렇게 좋아하는 족발을 앞에 두고도 입맛이 없다며 물에 밥을 말아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피곤하다며 먼저 방 안으로 사라졌다. 두어 시간 뒤 잠든 민서를 데리고 가서 가만히 아내 옆에 눕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스며들어온 거실 불빛에 잠든 아내의 얼굴이 살며시 드러났다. 초췌한 얼굴 위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내민 도형의 손이 아내의 볼에 닿자, 움찔하던 그녀의 입술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엄.... 마.... 엄... 마...”
그러고 보니 산후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 장모님과의 통화가 뜸해졌다. 조리원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통을 붙들고는 응석도 부렸다가 하소연도 했다가 마치 재잘거리는 여고생 같았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도형이 철이 없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사실 보는 내내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도형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아내 볼 위의 물기를 닦아주고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예식장을 찾기는 쉬웠다. 집에서 네비를 켜고 출발했는데 어느 한 도로에 접어드니 주변 환경이 왠지 낯설지 않은, 오히려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데자뷔인가? 코너를 돌아 건물을 발견한 순간, 아뿔싸! 도형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2년 전 자신이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예식장이었다.
“대리님, 식 올리신 그 예식장 어때요? 보기에는 깔끔하고 모던하던데 비싸진 않던가요?"
그러고 보니 6개월 전쯤 인가 결혼식에 다녀간 직장 후배가 물었었다.
“저도 조만간 날 잡을 것 같아서 예식장을 알아보고 있거든요.”
"아, 그래? 축하해. 근데, 사실 난 잘 몰라, 아내가 거의 다 알아서 했거든. 연락처 알아봐 줄까?"
별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걸 알았을까? 그 뒤로 가타부타 말이 없던 후배는 2주 전쯤 슬그머니 청첩장을 내밀었다.
예식장은 사람들로 붐볐고 도형은 사람들을 헤치며 눈에 띄는 직장동료 몇몇에게 손을 흔들며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급하게 오느라 축의금 봉투를 챙기지 못한 도형은 신부 측 사람들이 앉아있는 축의금 부스로 가서 봉투를 집어 이름을 썼다. 막 준비한 금액의 돈을 넣으려는 순간 봉투 앞면에 낯익은 로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Dream Company, 당신의 꿈이 실현됩니다.'
선전 문구는 짧았지만 바로 그 회사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스 전면부를 그 회사 광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을 실현시켜준다는 거야? 왠지 모를 회사의 얄팍한 상술이 느껴져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예식을 알리는 방송이 들리자 도형은 서둘러 인파 속으로 몸을 섞었다.
“신랑 측에 비해 하객이 너무 없어서요. 사진 꼭 찍고 가셔야 해요.”
청첩장을 건네주며 신신당부하던 모습이 눈에 밟혀서 도형은 식이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하객들이 빠져나가고 사진사가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무대 뒤에서 분장을 고치고 커튼콜을 위해 재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치장을 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무대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친척, 친지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며 카메라를 향해 리허설을 하듯 포즈를 취했다.
도형은 무대 앞에서 최 대리와 함께 지인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생각보다 적지 않은 하객들을 보고 어디서 엑스트라라도 동원한 거 아니냐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창 친척들 대상으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관객을 향해 포즈를 취한 많은 사람들 중에 초로의 한 여인이 도형의 시선을 끌었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도형은 이내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연거푸 사진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남의 친척 사진은 뭐 하러 찍어? 그렇게 친하지도 않으면서...”
최 대리는 알 수 없다는 듯 도형을 흘깃 쏘아보았다. 촬영을 마친 배우들.. 아니, 친척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도형의 시선이 쫓고 있던 그 여인도 무대 뒤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쪽 방향으로 나아가려던 도형의 팔을 누군가 잡았다. 최 대리였다. 그는 눈짓, 손짓으로 자신들이 서 있어야 할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선은 딴 곳을 쫓으며 도형은 최 대리를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인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무대 중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도형은 지인 단체사진을 찍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예식장 구석구석을 헤맸지만 초로의 그 여인을 찾을 수 없었다. 식사며 피로연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온 도형은 마침 민서와 낮잠에 빠져있는 아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이미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까치발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디에 뒀더라? 아래위 서랍들을 한참 뒤지던 도형이 묵직한 앨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결혼식 앨범이었다. 무슨 범접할 수 없는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앨범 속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던 도형의 손이 어느 한 여인을 담고 있는 사진에 멈췄다. 도형은 한참을 휴대폰 속 사진과 앨범 속 그 여인을 이리저리 견주어 보았다. 이윽고 앨범 속 사진을 천천히 꺼내 드는 도형의 손이 통제력을 상실한 수전증 환자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