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의 산후조리 후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형은 돌봐주실 분도 없고 해서 1주일 더 있자고 했지만 비용이 비싸다느니 집이 더 편하다느니 갖은 핑계를 대며 아내는 기어코 퇴원을 강행했다.
그 후로 근 2달이 흘렀지만 산후조리원에서보다 아내 얼굴 보기가 더 힘들었다. 도형의 직장생활에 지장이 갈까 걱정된다며 아예 아이와 함께 건넛방에 자리를 잡은 아내는 아이의 수유와 수면시간에 맞추느라 그의 생활 패턴과는 완전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도형은 힘든 독박 육아를 자처한 아내가 안쓰러워 육아를 분담하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돌까지는 자신이 전적으로 육아를 맡을 테니 대신 그 이외의 일은 도형이 알아서 하는 걸로 하자고 제의를 했고, 둘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밤에 아내가 도형의 수면을 책임지므로 그 또한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 아내가 잠들어 있으면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식사나 간단한 청소, 빨래 등 그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은 미흡하나마 그때그때 해나갔다.
평일에는 부모님이 두 분 다 일을 하셔서 주말에라도 도움을 청하자고 했지만 아내의 태도는 단호했다. 폐 끼치기 싫다며 묵묵히 홀로 육아를 해나가는 모습에선 무언가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퇴근하시나 봐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도형의 등 뒤로 반가움이 묻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 네.... 아... 안녕하세요?"
쾌활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앞집 아주머니였다. 나이차가 있어서 서로 왕래하는 사이는 아니고 오다가다 마주치면 의례적으로 안부를 묻곤 하는 흔한, 그런 보통의 이웃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도형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에 시선을 주며 그녀가 말했다. "네~ 아내가 통 뭘 못 먹어서요...”
도형은 겸연쩍어하며 oo 족발이라고 쓰인 봉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젖 먹이려면 한창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러게요..."
딱히 다음 대화로 이어질 화젯거리를 찾지 못한 도형은 가벼운 미소로 답한 뒤 엘리베이터 출입 문위에서 위층을 향해 깜빡거리는 화살표에 습관적으로 시선을 두었다. “아기는 잘 크죠? 너무 보고 싶다... 백일잔치하실 때 꼭 불러주세요..”
잠깐의 침묵이 어색했는지 그녀는 그 나이의 연륜에서 터득한 노련함으로 비교적 깔끔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 네... 그럴.. 게요..."
백일잔치... 그러고 보니 다음 달이 민서 백일이구나...
“이번 민서 백일 때도 너희 어머닌 못 오신다든?"
어머니는 당신의 심기가 불편하실 때는 사돈을 너희 어머니라고 칭하곤 하셨다.
“결혼식 때 혼주 석에 백부 내외분을 모신 것도 그렇고..."
도형의 끈질긴 설득으로 겨우 합의한 내용이었지만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사돈의 부재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건 지나간 일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손녀도 안 보고 싶은 가... 대한민국에서 사돈 얼굴 한번 못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원,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민서가 눈에 밟힌다며 한 달에 두 번꼴로 집에 다녀가셨다. 지난주에도 손수 만드신 반찬이며 텃밭에서 딴 푸성귀들, 김치 등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주섬주섬 냉장고 안에 넣고 있던 며느리 등에다 대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셨다. 당신이 받은 모멸감이나 무시를 며느리인 너라도 그 백분의 일이나마 느껴보라는 듯이.
어머니는 기분이 좋은 지 연신 할머니에게 까르르 대는 손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지만, 며느리를 겨냥한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돌잔치 땐 꼭 오시라고 해라. 비용은 우리가 댈 테니까." 어머니의 의도가 적중한 건지 미처 닫지 못한 냉장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 때문이었는지 아내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 그리고 우편함에 고지서들이 좀 있던데, 새댁이 몸조리하느라 못 챙겼죠?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도 2달치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알려준다는 게.. 아기가 있어서 초인종 누르는 것도 조심스럽고... 이제나 저제나 언제 한 번 만나나 했는데, 오늘 마주쳤네요..”
“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우편함들이 즐비해 있었다. 늘어진 가지처럼 축 처진 우편물 몇 개를 빼내자 아주머니 말대로 큰 부피의 관리비 고지서가 2장이나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형이 부랴부랴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 쥐고 있던 관리비 고지서들 사이로 편지봉투만 한 우편물 하나가 떨어졌다. 마침 옆에 있던 앞집 아주머니가 반사적으로 주워 주신 것을 받아 들며 가벼운 목례로 감사함을 표시했다.
'Dream Company' 낯선 회사명 옆으로 독촉장이라는 시뻘건 글씨가 시선을 압도했다.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옆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도형은 서둘러 다른 우편물들 사이에 그것을 쑤셔 넣고는 마침 집 앞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렸다.
뭐지? 고지서를 비롯한 모든 우편물과 자동이체 관련 건은 아내가 관리했고 비용은 도형의 카드나 통장으로 이체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워낙 셈이 빠르고 정확해서 연체라든지 미납이라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그녀인데... 독촉장이라...
아마 출산과 산후조리, 육아로 이어지는 2~3달간의 공백을 그녀 또한 피해가진 못했으리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Dream Company'라는 회사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아내에게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갑자기 솟구치는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마음에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아내를 찾았지만 집안은 고요했다. 혹시나 싶어 조용히 건넛방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곯아떨어진 두 천사가 숨을 쌔근대며 잠들어 있었다.
혹여나 깰까 천천히 방문을 닫고는 식탁에 앉아 잠시 그 우편물을 살펴보았다. 겉봉투에는 '미래 테크놀로지의 모든 것, 불가능했던 당신의 꿈을 실현시켜드립니다'라는 간단한 선전문구와 함께 연락처와 주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무심결에 봉투를 뜯으려고 하는 순간 '본인 외 개봉금지'라는 문구가 눈에 띄자 봉투 귀퉁이를 겨냥하고 있던 그의 두 손이 움찔했다.
벌써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아내는 입덧이 심해 임신 초기에 회사를 사직한 상태였다. 순간 확 달아올랐던 호기심이 다 타서 스러진 모닥불처럼 사그라들었다. 도형은 쥐고 있던 봉투를 가만히 식탁 한 귀퉁이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