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가 아파. 열도 나고...
차마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던 도형이 집 근처 포차에서 소주를 두 병쯤 들이킨 후였다. 식어버린 국물 속 우동 면은 기하급수적으로 몸을 불리는 괴 생명체처럼 어느새 두 배로 늘어난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십여 통의 부재중 통화 후 받은 휴대폰 저편, 아내의 목소리가 소주잔 속에서 일렁이더니 곧이어 거센 파도가 되어 도형을 집어삼켰다.
“술 마셨어?”
"응... 민서는?"
“해열제 먹고 방금 잠들었어.”
민서는 주방 불만 켜진 채 어스름한 거실 한편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민서 곁에서 가볍게 배를 토닥거리던 아내는 잠시 그를 쳐다보고는 이내 잠든 민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욕실로 향했을 도형이지만 따뜻한 실내 온기에 갑자기 취기가 느껴져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묵언의 신호를 보내고 등진 아내의 왜소한 등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요즘 장모님껜 연락 안 해?”
도형은 심술이 났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후벼 파고 싶다는 욕구가 술기운과 함께 스멀스멀 올라왔다.
“응... 민서 보느라 바쁘기도 하고...”
“여자들은 아기 낳고 키울 때 친정엄마 생각이 더 나고 보고 싶다던데... 자긴 반대가 봐?”
후벼 판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내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나, 참 못됐지? 이제 민서만 보이는 거 있지...”
아내는 손으로 민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잠든 딸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려는 듯 찬찬히 바라보았다.
“힘들지만 민서가 자는 거, 먹는 거, 웃는 거, 칭얼대며 우는 거, 심지어 똥을 한 바가지 싸는 것까지 내 눈과 마음에 다 담으려다 보면 어느새 몸은 지치고 하루가 꼴딱 지나가 버려...”
이미 도형의 존재는 잊은 듯 아내는 흐릿한 조명 아래 독백을 쏟아 놓는 무대 위 배우 같았다. 어느덧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연극 속 비련의 여주인공...
“내리사랑이란 말 있잖아.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가 알면 무척 섭섭해하실 거야..."
아내의 말투에서 씁쓸한 웃음기가 느껴진 순간 도형은 혼란스러웠다. 아내는 정말 장모님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배신감으로 팽배했던 도형의 마음 한 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감정들이 서로 뒤엉킨 채 도형의 장기들을 지지대 삼아 슬금슬금 감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늘 민서가 아파하는 걸 보니까 내 맘이 너무 힘든 거야. 그러면서 생각했지. 몸이든 마음이든 자식이 힘들고 아파하는 걸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까? 아마 지옥 그 이상이겠지? 아마 돌아가셨어도 평안한 곳으로 가지도 못 하고 자식 주변을 돌며 고통스러워하시지는 않았을까..."
아내는 그 고통이 느껴지는 듯 작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너무 나만 생각했어... 내 마음 힘든 것만... 그걸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아내의 목소리에서 어슴푸레 물기가 묻어났다.
그때였다. 취기 때문이었을까? 도형은 조용히 흔들리는 아내의 어깻죽지에서 무언가 꿈틀대고 있음을 느꼈다.
“... 내가.. 아니, 자식이 행복해야 부모도 기뻐한다는 걸 나에게 가르쳐줬어... 우리 민서가...”
가만히 민서를 바라보던 아내의 물기 품은 미소가 서서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 말이야...”
아내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어깻죽지의 움직임이 격해지더니 마침내 한 쌍의 날개가 살갗을 뚫고 나와 커다란 날개 짓을 했다.
순간, 도형의 눈앞에선 마침내 딸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지고 막 탈피를 끝낸 한 아이의 엄마가 흐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