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5)

나의 첫 소설

by 정현미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무겁기만 하던 처남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누나랑 엄마의 관계는 평범한 모녀관계 이상이었어요. 누나와 제가 초등학생일 때 아빠가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그 뒤로 엄마는 저희를 키우시느라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죠. 저는 그때 철이 없었고... 오롯이 누나 혼자 그 힘든 과정을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해야 했어요."

처남은 목이 타는지 반쯤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들이키곤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누난 대학 졸업 전에 취직이 됐어요. 졸업식 날 모처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하고 엄마는 평생 처음으로 공장에 휴가까지 냈는데... 누나 학교 근처였어요.. 막 바뀐 신호를 무시하고 과속하던 차에... 그만..."


그때였다. 도형의 머릿속에선 Dream Company에서의 프레젠테이션 장면들이 마치 진부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버랩되었다.

'2달분의 회비와 요청하신 프로그램 A에 대한 업데이트 비용이 연체되었습니다.'

도형이 별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렸을 때, 문득 연체 고지서 속 문구를 떠올리곤 구매를 위한 프로그램 설명을 요구한 것이 받아들여졌기에 가능했던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저희 프로그램은 지금껏 개발된 유수의 프로그램들 중에서도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제품으로써...”

실장이라 불리는 30대 중후반의 여성이 열심히 자기 회사의 제품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4차 산업의 개괄적인 설명으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은 제품의 뛰어난 성능과 우수한 연구진, 회사연혁과 해외지사 및 공장 현황 설명 등 장황하게 이어졌다. 지루함을 참아가며 듣던 도형의 집중력이 안갯속을 헤매듯 흐릿해질 즈음, 흩어진 도형의 이목을 다잡는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프로그램 A 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직접 대면할 수 없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 아예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고객의 니즈에 따라 특화된 기능을 발휘합니다.”

아예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 그건 무슨 의미일까?

도형의 궁금증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부분에 힘을 주어 말하는 실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도형의 가슴에 와 꽂혔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견딜 수 없는 이별, '죽음'이죠..."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여태껏 감정을 배제해오던 처남의 목소리가 조금씩 동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도형에게로 전염되었다. 도형은 저도 모르게 마시던 맥주잔을 떨어뜨리듯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잦아든 처남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유리잔이 테이블에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장례식 이후 누나는 영 딴 사람이 되었어요. 회사는 악착같이 다녔어요. 하지만 그 외의 생활은... 완전히 폐인이었죠. 밥은 거의 생존할 정도로만 입에 대고 울다 지쳐서 잠들고 다음날 일어나 회사 가고... 또 울다 지쳐서 잠들고...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죠. 이러다 사람 죽겠구나 싶었어요. 그러던 차에 제 푸념을 듣고 있던 동종 IT업계 친구에게서 어떤 AI 프로그램에 대해서 듣게 됐어요."


“먼저 사망하신 분의 휴대폰과 프로그램 이용자의 휴대폰에서 수집한 모든 통화 내용을 AI에 입력합니다. 그러고 나면 AI가 내용을 분석한 후 연관성 있는 부분을 취합해 다양한 형태의 상황극을 만들죠. 생전에 주고받은 내용을 토대로 자연스러운 대화는 물론, 각 상황에 대한 대처와 임기응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도형에게서 미심쩍은 표정을 읽었는지, 주어진 홍보 시나리오의 일부인지 실장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벽에 걸린 대형 컴퓨터 화면에서 오디오 파일을 열었다.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이었다. 젊은 엄마와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10대 아들의 대화 같았다. 아들은 타국에서 유학을 하는지 이것저것 살뜰히 챙기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애틋함이 한껏 묻어났다. 고객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본보기인 듯했다. 무언가 꼬투리 하나라도 잡아내려고 청각을 곤두세우기가 무색하리만치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이 내용은 바다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익사사고로 아들을 잃은 경우입니다. 아들이 초등학생이었죠. 어머님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아버님이 의뢰하신 건입니다. 특히 사고 등으로 갑자기 가족을 잃었을 때 그 슬픔이 훨씬 더 크죠. 프로그램을 첫 세팅할 때 고객이 원하는 상황을 하나 설정하는데 이 경우는 아들이 외국에서 유학하는 것으로 세팅된 거예요. 그리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상황을 설정해야할 경우엔 새로 업데이트를 신청해주셔야 해요. 얼마든지 바뀐 상황으로 업데이트를 하실 수 있어요. 물론 그 비용은 따로 부담하셔야 합니다.”


“누난 썩 내켜하지 않았죠.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입힌 AI와 통화를 하면서 조금씩 생기를찾기 시작했어요. 어떤 때는 엄마가 정말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믿는 것 같았어요. 놀람에서 설렘으로, 그리곤 일상이 되었죠.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죠. 엄마의 죽음을 아는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었어요. 심지어 친척들까지도...”


도형은 처남 선우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장모님과의 그 애틋한 대화가 모두 허상이라니... 엄마랑 통화할 때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 환한 미소, 투정 부릴 때의 그 생생한 표정... 그녀는 그를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일까?

미리 말하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라며 그 무뚝뚝한 처남이 흘리는 눈물도 도형에겐 그 어떠한 위로도 되지 못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