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미 Oct 13. 2022

엄마와 딸

요양원에 계신 엄마와의 외출


 "언제 올 건데?"

코로나의 재확산으로 위중증 환자의 위험군이 대다수인 요양원에선 9월 말까지 모든 면회와 외출이 금지되었었다.

코로나가 발발하기 전에 입소한 엄마는 어느덧 요양원 생활이 만 4년이 넘은, 그야말로 요양원의 터줏대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코로나가 잠시 잦아들었을 때 남편과 함께 방문해 하루 종일 콧바람을 드리긴 했지만 다시 모든 대면 접촉이 금지되는 바람에 얼굴이 아닌 목소리로만 소식을 전한  벌써 세 달을 넘기고 있었다. 

 유독 갑갑함을 호소하는 친정엄마의 하소연속에 내비치는 외로움이 휴대폰을 타고 나에게 전해 때마다 위로 삼아 외출금지가 풀리면 바로 달려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날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금지가 풀렸다고 언제 올 수 있냐고...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건 엄마의 목소리에선 차마 강제할 순 지만 오랜 기간 가족과의 나들이를 오매불망 기다렸아이의 순진무구함이 절절이 묻어났다.



 부랴부랴 외출 예약을 고 다음날 점심시간 전에 요양원에 도착했다. 드시고 싶다던 회로 식사를 하고 나서 이젠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이전에 살던 동네 시장으로 엄마의 옷과 신발사러 갔다.

 몇 년 전 어느 여름날 갑자기 결정된 요양원 입소로 변변한 가을 옷 하나 없는 엄마... 겨울도 그렇게 느닷없이 닥칠 건지 요 며칠 날씨가 심상찮았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의 50년을 살아온 그 동네를 지날 때마다 비슷한 연배의 상인이며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며 안부를 물어왔다.

두세 걸음 뗄 때마다  인사를 주고받느라 걸음을 멈추고 일일이 화답하는 엄마의 모습은 흡사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펼치고 있는 국회의원의 행차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서로를 껴안으며 과장된 몸짓도 주저하지 않는 어르신들의 인사치레는 서글프면서도 딱히 과하다 핀잔 줄 수 없는, 그들 나름의 묵시적 의식을 치르는 듯 모종의 위엄이 서려있었다.

피 터지는 전장에서 죽은 줄 알았던 전우가 살아온 듯 그 생존을 기뻐하는 모습에선 왠지 모를 비장감 또한 감돌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해서 그렇게 억울해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보이지 않던 지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새삼 반가움을 너머 벅찬 감동으로까지 치닫는 건, 아마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서로 부대끼며 함께한 세월이 켜켜이 쌓인 탓이리라.


 격한 포옹과 인사 후에 그들은 마치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덧붙였다. 삶이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꿋꿋하게 살아남으라고...

서로를 바라보는 어르신들눈빛에선 이미 그들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 듯, 지금 당신들의 삶을 꿋꿋이 이어나갈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 또한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덧붙이는 사족...

자식은 믿지 말라고... 특히 아들은...

내 앞이라 그랬는 딸이 최고라며 아들은 아무 소용없다는 말들을 너나없이 푸념 삼아 덧붙이셨다.

"엄만 좋겠네... 남들이 부러워하는 딸을 이나 둬서..."

내친김에 내가 생색내듯 농담을 하자 웬일인지 평소 엄마답지 않게 선뜻 수긍을 하신다.

이 나이엔 돈보다 딸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라고...

말하고 나선 괜히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셨다. 아들만 둘 가진 딸내미의 미래가 너무나 빤히 들여다 보였는지 당신의 처지보다 안됐다는 듯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다가 못내 입을 떼신다. 

"딸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지금이라도 하나 낳을까?"

우스갯소리 삼아 되받으면서 생각했다. 이미 우린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자식들에게 뭔가를 기대할 세대는 아니라고...

또래 대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나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죽는 날까지 제 몸 하나는 추스리기 위해 안 하던 운동에 신경 쓰는 것부터 경제적으론 노후자금을 마련하느라 기를 쓰고 있는 작금의 풍토가 그런 흐름의 일환임을 잘 안다. 나 또한 그 무리의 한가운데 이미 발을 들여놓은 상태, 우린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나 스스로, 아님 배우자들끼리 서로를 책임져야 할 세대임을 너무 일찍 인식한 터였다.


 

 바깥공기를 애타게 그리워했던 엄마를 위해 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다대포의 한 카페를 찾았다. 연휴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카페를 동작이 굼뜬 노인을 모시고 방문하자니 눈치가 보였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딸을 눈앞에 두고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엄마는 여든두 살의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정정해 보였다.

하지만 노인의 앞날은 장담할 수 없는 , 그렇게 소원이라는 바깥공기 한 번 마셔보지도 못한 채 그토록 갑갑해하던 요양원에서 엄마의 생을 마감한다면... 그로 인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힘겨워할 나를 위해서, 난 엄마의 말에 장단 맞추며, 때론 장난 삼아 딴지를 걸어가며 오랫동안 귀를 빌려주었다.

그날 외출의 마지막 수순으로 엄마가 드시고 싶다는 냉면을 한 그릇씩 나누고서야 우린 각자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공간으로 돌아갔다.


 9시쯤 걸려온 엄마의 전화...

잘 도착했냐고... 당신 때문에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전을 피우며 재미있었냐는 나의 물음에 좋았다고,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했다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미안함과 편안함이 교차하는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난 그날 평소 지인과 흔하게 하던 일을 엄마와 함께 했을 뿐인데...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박하게 굴며 내어주지 않으려고 했던 건 '시간'이었다는 것을, 엄마에게 애틋함을 느끼지 못한 게 당신의 덧정 없는 말투행동 때문이라 애써 외면해왔었는데 실은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의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기꺼이 내어주지 못한 내 탓이란 걸 오늘에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나자 내 안에서 왠지 뭉클하면서 애잔한 무엇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건 여태껏 내겐 없으리라 여겼던... 굳이 이름 붙이자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 엄마에 대한 '애틋함'이라는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형제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