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아까워서 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했던 몸에 나이라는 무게가 더해지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움직여주지 않으면 그 수명을 가늠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에 우선 시작한 것이 가벼운 걷기였다.
그날도 그나마 만만한 용지호수를 두어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5층짜리 아파트들이 밀집해있는 주거지를 통과해 걷고 있는데 마침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적어도 열 살은 넘어 보이는, 얼핏 봐도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또 다른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말을 건네고 있는 아이는 시원하게 깎은 스포츠머리에 똥글똥글 야무져 보이는 녀석이었다.
내가 막 그 옆을 지날 때쯤 그 아이의 목소리가 내 귀에 와 꽂혔다
"... 휴대폰 할 거가? 걸어 다니면서 휴대폰 하면 안 된다."
그 말을 듣고 쭈뼛거리던 형뻘인 남자아이가 알았다고 응수했는지 아님, 흘깃거리며 잠시 쳐다보고 말았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내 내가 왔던 방향으로 가던 길을 계속 갔다.가방을 멘 걸 보니 하굣길인 것 같았는데 꼬맹이의 충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유유히 제 갈 길을 갔던 걸로 기억한다.
둘이 아는 사이인지 생판 초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 녀석 봐라.
나도 모르게 당돌한 녀석에게 관심이 갔다.
저보다 덩치 큰 형인데도 전혀 문제 될 거 없다는 듯 선도부 역할을 해대던 녀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잠시 오른쪽 방향을 주시하더니 곧 건너편 5층 건물을 올려다보며 엄마인듯한 사람을 향해 외쳤다.
"버스 온다!"
녀석이 다시 눈길을 준 곳에서 샛노란 버스가 인근 도로로 막 진입해 오고 있었다
학원에라도 가나?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좀 떨어진 곳에서 그 아이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학원차를 타고 갈 동안만.
하지만 웬걸? 멈춘 버스에서 네댓 살쯤 돼 보이는 고물고물 한 햇고사리 같은 또 다른 녀석이 내렸다.
녀석은 동생을 마중 나와 있었던 거였다.
형제의 애틋한 상봉을 기대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차에서 내려 선생님과 배꼽인사를 하면서도 둘은 대면 대면했다.
너무 이른 거 아닌가?
남자 형제들의 어색하면서도 쿨한 관계의 출발점을 찾아낸 것 같아 당황스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형아에게는 아직 수행해야 할 미션이 남아있었다.
곰살맞진 않지만 그래도 동생을 안전하게 집까지 데리고 가는 데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인, 두 개의 횡단보도가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이내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는 동생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찰나, 저만치서 까만색 승용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즉시 한 팔로 동생을 저지시킨 던 형은, 차가 지나가자 다시 예의 그 냉철한 눈빛으로 좌우를 살핀 후 '건너'라는 짧은 명령을 신호로 둘은 횡단보도를 함께 건넜다.
이어진 다음 횡단보도에서도 녀석은 긴장감을 잃지 않고 형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장애물들을 무사히 넘긴 두 형제는 긴장이 풀린 듯 걷는 자세가 좀 느슨해 보였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는 나란히 걷는 것조차 싫은지 아예 서로에게 거리를 두며 대면 대면한 모습의 평범한 현실 형제로 돌아가 있었다
문득 두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한 정거장쯤 떨어져 있는 이웃 아파트 안에 있었던 어린이집에서 작은 애를 데리고 오는 것은 늘 네 살 터울의 큰애 몫이었다.
안 그래도 고집이 센 편인 작은 애를 1년 남짓 집까지 데리고 오면서, 그 길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 나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늘 군소리 없이 잘 따라주어 그러려니 했었다.
한 번은 힘들다고 울부짖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서야 큰 애 역시 보호받아야 할 나이임을 깨달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