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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Nov 10. 2022

돈키호테를 완독하다

돈키호테 2부를 읽고 나서...


                          돈키호테를 완독하다.


  마침내 돈키호테 2부의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1부로 시작한 지 거의 한 달 만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근 4주를 돈키호테와 산초를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한  이제는 마치 이웃사촌인 양 친근해져서 2부를 끝으로 작별하려니 못내 아쉬웠다.


 돈키호테 1부가 총 52장으로 거의 600페이지인데 반해 2부는 74장으로, 두 권을 합치면 무려 1200페이지가 넘었다.

 아무리 써도 재물이 줄지 않는 화수분처럼 초반에는 계속 읽어도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아 난감하기도 했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고 보니 캐릭터들과 정이 들어서 인지 완독 했다는 성취감보다 더 이상 황금알을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위의 배를 갈라야 하는 상황에 놓인 듯 씁쓸함이 한층 더 컸다.




                        돈키호테 2부의 내용에 앞서


  돈키호테 2부는 1부가 나온 지 거의 10여 년만인 1616년에 출판되었다. 앞선 리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돈키호테'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예상치 못한 흥행으로 수많은 아류작들이 횡행했다. 급기야 다른 사람에 의해  쓰인 위작이 2부로 먼저 나오는 바람에 당시 2부의 59장을 쓰고 있던 세르반테스가 분노와 위기의식을 느껴 집필을 앞당겼다고 전해진다.

 2부를 출판하고 몇 개월 후에 작가가 사망했다고 하니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을 그의 사투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위작이 없었다면 돈키호테는 아마 한 권짜리 소설에 그쳤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을 넘나드는 상반된 감정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러고 보면 세상 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2부에서는, 1부가 소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상 사람들이 돈키호테와 산초의 존재와 활약상을 이미 알고, 그들이 나타나는 장소마다, 오늘날로 치면 연예인이나 셀럽을 대하듯 환호한다는 설정을 그대로 소설 속에 반영하고 있다.

 또한 2부의 위작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돈키호테와 산초가 그 조잡한 내용에 분노하는 장면들이 소설 곳곳에 나오기도 하는데, 심지어 그들이 사라고사로 향한다는 내용이 위작 속에 있다는 이유로 돈키호테가 그들의 목적지를 바르셀로나로 변경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세르반테스 자신 또한 책 서문에서, 위작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척하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는 주인공을 통해 고스란히 소설 속에 녹아있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이점은 작가가 본문 초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1부의 오류 내용들을 직접 언급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돈키호테와 직접 관련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썼다든지, 인과성이 부족한 몇몇 내용들(산초가 자신의 잿빛 당나귀를 도둑맞은 후 되찾았다는 내용 없이 집으로 돌아올 때 그 당나귀를 타고 왔다거나, 귀족으로부터 얻은 돈의 행방 등)에 대해 캐릭터의 입을 빌려 해명하는 장면들이 특히 독특했다.

 세르반테스는 1부와 마찬가지로 아랍 학자인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의 원작을 자신이 번역한 것뿐이라며 너스레를 떨며 2부의 서두를 시작한다.




                     돈키호테 2부의 내용 속으로...


 돈키호테 2부는 두 번째 모험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귀가한 주인공이 한 달 정도 몸을 추스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부에서 돈키호테를 속여 소달구지에 싣고 온 신부와 이발사, 그리고 이번에는 학사 까르라스코라는 인물까지 합세해 그의 모험을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으로, 결국 돈키호테는 세 번째 모험을 나서게 된다.

 산초는 영주직을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동행하게 되는데

얼핏 보면 실리를 챙기는 것 같지만 돈키호테라는 허황된 인물에게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산초의 어리숙함과 순진한 면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세 번째 모험에서 그들은 돈키호테가 오매불망 그리던 둘시네아 공주를 찾아 톨레도로 향한다.


 주인공들은 여러 가지 모험 끝에 소위 그들의 열혈 팬인 공작 부부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부부는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 그들을 속이고, 어리숙한 주인공들이 계획대로 속아 넘어가는 모습에 박장대소하며 그들의 유희를 즐긴다.

 그리고 공작 부부의 계획 중의 하나로 드디어 산초는 그가 바라 마지않던 어느 섬의 영주가 된다.

부부는 황당한 상황들로 영주가 된 산초를 곤혹스럽게 하지만 산초의외로 이러한 과정들에 슬기롭게 대처하며 성 주민들에게 존경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그릇을 깨닫고 영주직을 돌연 사퇴한 산초는, 우여곡절 끝에 돈키호테와 재결합하면서 사라고사에서 바르셀로나로 변경된 그들의 최종 목적지로 향하게 된다.


 한편 돈키호테의 친구인 신부와 이발사, 학사 까르라스코

에게는 돈키호테의 황당한 모험을 멈추게 하는 계략이 있었다.

까르라스코가 또 다른 편력 기사로 위장해 돈키호테에게 결투를 신청하면서 자신이 승리할 경우 모든 모험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년을 은둔하라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까르라스코는 거울의 기사, 숲의 기사, 마지막으로 은빛 달의 기사로 분해 마침내 돈키호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돈키호테의 죽음

 낙담한 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돈키호테는 고향에서 양을 키우는 목동 생활을 해보자며 산초와 소소한 꿈을 위로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제정신을 차린 돈키호테는 방랑 기사에 대한 모든 것을 혐오하며, 가까운 이들에게 유언을 남긴 후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어느 노인의 편력 기사 여행기가 끝을 맺는다.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세르반테스는 이 소설을 통해 그 시대에 유행했던 허무맹랑한 편력 기사 이야기의 폐해를 알리고자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접함으로써 운이 좋게도 미지의 세계인 지구 반대편 세상의 시대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계급사회였기에 귀족들이 쓸데없는 소일거리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는 반면, 소작농으로 대표되는 하층민은 비록 삶이 힘겹고 궁핍하더라도 결코 노예처럼 비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을 드러내는 모습이 거침없고 당당해 보였다.

 특히 산초와 그의 부인 떼레사가 모험을 떠나기 전 나눈 대화에서는, 어떤 부와 권력을 얻더라도 당당한 자유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떼레사의 당찬 의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또한 제도권의 교육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산초가 상황에 적절한, 생생한 속담들을 연일 쏟아낸다든지, 영주의 자리에서는 어느 지식인 못지않게 현명하게 대처하는 모습에선 실생활에서 몸소 체득한 살아있는 교육의 산증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감탄을 너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그의 건강한 철학은 정말이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꼭 한 번 새겼으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외부의 요구가 있어서가 아닌, 산초 스스로가 영주직을 기꺼이 내려놓고, 떠나기 위해 그의 애당나귀 잿빛이를 찾아 어루만지며 우는 장면에선 그야말로 안타깝고 가슴 뭉클했다.


산초와 그의 당나귀


 한편 돈키호테 또한 산초가 영주로 떠나기 전에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들을 조언하는데, 공직자라면 반드시 숙지했으면 하는 내용들로 일괄하는 모습에선 지식인으로서 그의 소신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위 리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을 정도였다.


 1부에서는 많은 웃음을 자아낸 돈키호테의 행동들이 황당하기도 하고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가 벽창호같이 느껴지는 면이 많았다.

2부에서의 그는 여전히 엉뚱하긴 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평소에는 얼마나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박학다식한 사람인지 소설 곳곳에서 그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대로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기다린 것은 죽음뿐이었다.


 돈키호테의 허무한 죽음을 보며 그의 행동들을 미쳤다고 보는 시선들이 정녕 정상적인 사람들의 시선인가, 아니면 대다수의 시선이기에 그것을 표준이라고 생각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흔히 이미 짜진 판을 흔들려고 하는 행동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며 미쳤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다수가 인정하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를 우린 다 미쳤다고 하는 건 아닐까?

 자신에겐  이상이고 신념이었던 행동들을 계속 무모하다고, 심지어는 미친 짓이라고 폄하해대는 다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굴복했을 때,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평탄한 궤도 안에 안착했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정상으로 인정받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어땠을까?

철이 들었다고...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마침내 제도권 내로 안착했다고...

사탕발림 같 축하는 들을지언정, 더 이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는 세상, 자신의 두 날개가 이미 꺾였다는 걸 안 돈키호테에게 어쩌면 삶에서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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