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테스트로 토요일을 허비하는 바람에 멤버들과의 게임 커뮤니티에는 일요일에나 참가할 수 있었다. 규진은 초반에는 학교동급생이나 아는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캐릭터들과의 만남이 늘어났다. 때론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친구들에 의해 원하지 않는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언젠가부터 익명이 훨씬 더 편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현재 규진 주변에는 현실세계에서 연이 닿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가상세계에선 개인이 들어오는 시간에 따라 배정되는 게임에 들어가는 개인플레이 위주가 대부분이지만 근래에는 실력 있는 멤버들을 영입하여 공동전선을 이루는 커뮤니티 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 멤버수가 늘어서 하나의 거대한 집단이 형성되면 가상세계에서 특정한 파워를 갖게 되고 게임에 임할 때 그 집단에서 차출된 멤버로 팀을 짜면 승률 또한 한층 높았다. 지금 가상세계는 실력이 출중한 영웅들을 선점해서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세력을 불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이른바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든 형국이었다.
규진도 꽤 많은 인원을 상위에 랭크시킨 제법 규모가 큰 한 커뮤니티의 멤버로 활동 중이었다. 1년 전 낯선 이로부터 쪽지가 하나 왔었다.
닉네임이 에릭인 그는 규진의 게임스타일과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멤버로의 영입을 제안했다. 마치 엔터테인먼트회사에서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당한 것처럼 들뜨고 기뻤지만 고민 또한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어딘가에 소속이 되면 다른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시간을 게임에 집중해야 하고 그만큼 학교 성적은 바닥을 칠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 또한 성적하락의 원인을 게임에서 찾을 것이고 자연히 부모님과의 갈등의 골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규진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규진은 며칠의 고민 끝에 커뮤니티 가입을 결정했다.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수만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규진의 커뮤니티는 핵심 멤버는 50명 정도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 회원 명부에는 올라와 있지 않지만 많은 선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보트하며 커뮤니티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고 게임에 대한 모든 질문과 해답의 통로인 채팅창이 항상 열려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고 개인은 오직 온라인상의 존재와 활약상으로만 평가됐으며 팀워크 또한 중요시 여겼다.
혼자 고전하던 개인플레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오로지 가상세계에서 머리를 맞대고 전략, 전술을 짜가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공동의 목표를 이뤄나가다 보면 격전지에서 피어나는 전우애, 동지애가 이런 게 아닐까 싶은 감정들이 북받쳐 오르기도 했다. 규진은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성적으로만 평가되는 현실세계의 삶에 속상해하거나 연연하지 않았다.
같은 분량의 노력이라면 차라리 재능 있는 곳에 쏟아붓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쉽진 않았지만 그 결실을 하나씩 하나씩 수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게임실력이 늘어갈수록 커뮤니티에서 그의 존재 가치도 올라갔고 규진은 어느새 핵심멤버 50의 진입을 눈앞에 둔 발군의 실력자도 급부상하고 있었다.
"요즘 어때? 실력이 나날이 늘던데.."
그날도 규진이 집으로 소환되기 전 커뮤니티에 남아 모의 경기를 하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에릭이 채팅을 걸어왔다.
"재밌어, 하는 만큼 성과도 나고."
이곳에선 존대하지 않았다. 나이 따윈 상관없었다. 여기선 모두 친구고 동지니까.
"어려운 점은 없어?"
"어...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현실세계로 소환되어 가야 된다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귀찮아. 전적으로 내 의지가 아니니까. 하긴 내 의지였으면 영영 안 갈 수도 있겠지 흐흐..."
규진은 말해놓고도 허황되다 싶었는지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여기 핵심멤버라면 다 비슷한 생각을 할 거야. 우린 모두 화면 밖 세계에서 부여받은 역할이 있지. 비록 내가 선택하진 않았지만 최소한의 의무는 하고 살아가야 해, 최소한 여기서의 권리라도 누리려면 말이야. 육체를 가졌으니 의식주도 해결해야 하고. 원하는 캐릭터로만 존재한다면 필요 없는 것들이겠지만."
"원하는 캐릭터로만 존재한다? 재밌는 생각이군."
규진은 화려하게 치장한 채 다른 이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된 자신의 캐릭터를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중학생시절 자신의 모습과 겹쳐져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도 슬럼프란 게 있고, 너의 고민도 더 깊어질 때가 올 거야. 그땐 미스터 엠에게 한 번 연락해 봐. 우리의 매니저이자 헤드헌터지. 너를 이 커뮤니티로 불러들인 것도 그니까."
'미스터 엠...'
학원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규진은 서둘러 로그아웃하고 현실세계로 복귀하며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엄마의 퇴근시간을 넘길 뻔했다. 규진은 부랴부랴 식탁 위에 놓여있던 빵 한 조각을 물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엄마와 딱 마주쳤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학원 다녀올게 하는 소리가 빵과 함께 씹혀 목구멍 아래로 삼켜졌다.
"밥은 먹었니?"
규진의 등뒤로 피곤이 묻어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 빵 한 조각이 첫끼임을 새삼 깨달았다. 갑자기 몰려온 허기를 안고 규진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