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이 한 반인 학원의 작은 강의실에서 규진은 뒤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선생님의 강의를 흘려보내며 오늘 했던 게임을 되새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뀐 선생님마다 새로운 학생에 유독 많은 관심을 표하긴 했지만 이내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몇 개월 다니다 그만 둘 건데 선생님이 연락하시면 그 시기가 앞 당겨질 뿐이에요."
수업태도나 숙제에 대한 지적이나 부모님과의 연락을 빌미로 한 선생님들의 협박도 규진의 되바라진 도발로 유야무야 되기 일쑤였다. 겉으로나마 부모를 거역하지 않는 선에서 나름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려는 규진의 생존전략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부터 엄마의 계획에 따라 새 학원으로 옮겼다. 규모가 크지 않아선지 원장의 교육관에 의한 건지 보조 선생님과 상담선생님을 둔 채 수업은 거의 원장이 소화하고 있었다. 입소문에 비해 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
'소수로 가려 받으면서 회비를 세게 받겠다?'
규진은 원장의 검은 속내를 이미 간파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학원을 전전하면서 규진에게도 나름 전략이란 게 생겼다. 우선 첫 달은 학생 파악 차원에서 신입생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이므로 그 어떤 분란이나 이목을 끌 여지를 만드는 건 금물이었다. 될 수 있으면 고분고분한 태도를 견지하며 숙제도 최대한 성의를 보여 모든 선생님에게 모범생 이미지를 남겨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들통나겠지만 최대한 그 기간을 길게 잡는 게 규진의 목표였다. 어차피 공부에는 마음이 뜬 상태고 학원을 자주 옮겨 다니며 초기의 긴장 상태를 반복하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12월엔 팀이나 규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대회가 있었다.
연중 가장 많은 상금과 멋진 아이템들이 부상으로 걸려 있었으며 그동안 갈고닦은 개인 게이머들의 랭킹이 확정되는 대회였다. 더불어 순위 내 게이머들을 배출한 커뮤니티의 위상도 어느 정도 판가름 나는 경기이기도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너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는 하고 살아야지. 이런 권리라도 누리려면...”
문득 에릭과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다. 하긴... 규진의 성적을 견뎌내느라 무지 애쓰고 있는 엄마에게 더 이상의 문제로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나름 엄마를 위한 선택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모든 것이 까발려져 영영 게임 세상 속으로의 출입을 금지당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자신의 비굴함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일부가 된 가상세계의 삶을 위해선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했다.
학원을 다닌 지 한 달쯤 되는 날이었다. 수업을 마친 원장이 규진을 옆 강의실로 불렀다. 얼쯤해하며 들어선 규진에게 앉으라고 눈짓을 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책 한 권을 규진 앞 책상 위에 던지듯 놓았다. 규진이 숙제용으로 쓰고 있던 수학교재였다. 규진은 순간 뜨끔했지만 이내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학원에서도 이랬니?"
“무.. 슨.. 말씀이세요?
“테스트할 때부터 짐작은 했는데..."
원장은 잠시 규진을 쳐다보다가 책상 위 교재를 두어 번 넘겼다. 손으로 특정 페이지를 툭툭 치면서 시선은 다시 규진을 향했다. 동그라미, 체크, 세모표시들로 난도질된 자신의 숙제 교재를 무심한 듯 쳐다보고 있던 규진을 향해 원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분야에 20년 이상이면 그 분야에 관해선 웬만한 건 척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라 한 달은 지켜봤어. 나름 머리를 써서 숙제랍시고 흉내는 낸 것 같은데 나한텐 어림도 없는 일이야. 대충 베껴 쓰고, 중간에 변조하고, 답만 옮겨 쓰고 한 것 같은데.."
이쯤에서 반격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초장에 밀려버리면 앞으로의 생활이 피곤할 것이다.
“답지는..."
“답지는 학원에 두고 다닌다고 하수나 하는 변명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기선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규진은 무언가 이 상황을 타계할 비장의 무기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허를 찔리고 만 것이다.
" 최선을 다했는데 억울하다느니, 자존심이 상했다느니, 인권이 유린당했다느니 이런 구질구질한 핑계는 사절이야. 당장 엄마한테 말해서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 그건 집에 가서 상의하시고...”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원장은 규진의 수를 이미 다 꿰고 있는 듯했다. 월급을 받으며 고용된 강사와는 뭔가 다른 카리스마가 규진을 서서히 옭아매고 있었다.
“근데 내가 어머니와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한 달만 더 너에게 투자하기로 하겠어. 그 기간 안에 무언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 일단 어머니껜 한 달 더 지켜보겠다고 말씀드릴 텐데 그 이후에도 변화가 없으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 너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갖고 싶은 어머님껜 충격이겠지만 그게 네 부모님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하니까. 부디 서로 얼굴 붉힐 일 없기 바란다."
역공을 당한 규진은 원장이 강의실을 떠난 후에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요즘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텅 빈 표정의 엄마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어수선했다. 차라리 전처럼 잔소리라도 하지... 규진은 오늘부터 새로 할당된 숙제 프린트물을 주섬주섬 가방에 쑤셔 넣었다.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와 미친 듯이 대화하며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집으로 향하던 규진은 발걸음을 돌려 집 근처 PC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