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소종? 랍상소우총?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 했나. 타고난 기질이 어딘가 남성적인 탓일까. 나 역시 가을이 제일 좋다. 여름 내내 열기에 날뛰던 내 몸과 마음 모두 제자리를 찾는다. 10월 무렵 가을비가 추적추적 몇 번 내리고 나면 비로소 코트 깃을 세우는 찐 가을이 온다. 그런 날 낙엽 위로 떨어지는 타닥타닥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 고픈 차. 바로 정산소종이다.
정산소종은 중국 복건성 무이산 동목촌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홍차이다. 청나라 시대,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차농들이 만들던 차를 놔두고 피신을 갔다. 돌아와 보니 차는 이미 발효된 상태였다. 그것을 아깝다 여겨 소나무 장작불로 말려 만든 것이 정산소종의 시작이다. 세상 만물의 기원을 스토리텔링 해내는 중국이기에 어느 정도는 가감이 있겠지만 어쩐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유럽에서는 중국차가 고급품으로 취급되어 많이 수출되었다. 이때 정산소종을 수출하던 항구 지역 방언으로 소나무를 뜻하는 ‘랍상’이 붙어 ‘랍상소우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이 훈연된 향에 매료되었고 점점 더 짙은 향을 찾게 되었다. 마치 매운 맛에 길들여진 한국인을 위해 새로이 출시되는 신라면 스코빌 지수도 점점 높아지는 것과 비슷한 걸까.
어느 곳에서는 정산소종과 랍상소우총이 종종 혼용되지만 맛은 제법 다르다. 본디 정산소종은 랍상소우총에 비해 단향, 꽃향이 섬세하게 피어나 전체적으로 우아하다. 정산소종에 반한 한 유럽의 귀족이 이 향을 모방해서 베르가못을 가향한 것이 얼그레이라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랍상소우총은 마치 정로환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훈연향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찻집에서 랍상소우총을 주문하면 ‘향이 꽤 강한데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묻는 경우도 많다. 위스키의 스모키함을 닮아 있어서 위스키 매니아에겐 꽤 인기가 있다. 나 역시 오늘까지 술이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은 밤에 위스키 대체재로 자주 찾는다.
그나저나 흐리면 흐리다고, 밝으면 밝다고, 비 오면 비 온다고 밤마다 마셔대니 속이 멀쩡할 리가 없다. 그래도 대신 마음은 평온 해졌으니 결국 똔똔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