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솟는 여름엔 간담이 서늘한 스릴러 문학을 선호했다. 하지만 올여름은 숨 막혔고 피곤했다. 책을 읽으려고 집중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들었다.
이런 배경 탓이었을까.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가장 얇았고, 매끈한 뒷커버에 좋아하는 책과 영화의 감독인 경애의 마음의 김금희 작가와 벌새 김보라 작가의 추천사를 읽고 주저 없이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형제가 많은 틈에서 자란 주인공은 어느 날 다른 집에 맡겨지게 된다. 언니들과 남동생 그리고 임신한 엄마의 돌봄이 받기 어려워진 주인공이다. 클레어 키건은 맡겨진 날부터 집에 돌아오는 날까지의 소녀의 마음을 성장의 서사로 무심한 듯 하지만 구슬프게 표현해 낸다.
책을 두 번쯤 읽을 때야 비로소 소녀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한다.
처음 킨셀라 아저씨 집에 도착했을 때 소녀는
[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17p ]
[ 이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마당을 가로지르는 묘하게 무리익은 바람이 이제 더 시원하게 느껴지고,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다가온다. 21p ]
[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24~25p]
[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0p]
라고 생각한다.
소녀에게는 자신이 살던 세계와 맡겨진 집의 세계가 다른 차원으로 교차되고 있다.
소녀의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어른들의 다정함과 따스한 손길들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차이,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이 상처로 생겨나기 시작한다.
맡겨진 집에서 킨셀라 아저씨 부부를 관찰하면서 집과 그들의 행동에서 모호한 상실의 기분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낯설고 생경한 기분은 소녀에게 불안감을 일으키고 , 이 불안감은 결국 첫날밤의 소변 실수로 이어졌다. 이 실수로 소녀는 불안감과 상처를 내는 상황을 종료시키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 하지만 킨셀라 부부는 그저 조용하게 그녀를 감싸준다
읽는 내내 클레어키건이 표현한 불안한 소녀의 마음은 넷플릭스 시리즈 빨강 머리 앤에서 앤의 마을에 금광 열풍을 몰고 오게 하고 돈을 뜯으려는 사기꾼들과 함께 지내면서 앤이 느끼는 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을 꿈으로 표현한 장면과 놀랍도록 흡사하다고 생각됐다.
이 두 가지 장면이 연결되면서 12살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 떠올랐다.
집에서 큰 사고를 치고 엄마한테 혼날게 무서워 언니와 단둘이 작은 아버지 댁을 찾아 4시간이 가까이 여주 시내를 걸었다. 길을 찾지 못해 4시간을 걷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택시를 타자고 언니를 설득했다. 그 와중에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길거리 트럭에서 파는 내 몸통만 한 수박을 샀다. 그걸 들고 하루는 작은 엄마댁에서 하루는 고모댁에서 떠돌며 잠을 잤다.
큰 고모댁에서 잠을 잔 첫날, 이제 막 가슴이 살짝 나오기 시작한 나에게 고모는 어린이용 메리야스로 갈아입고 나오라고 했다. 샤워를 마치고 새로 사주신 메리야스로 갈아입자 , 거울 속에 가슴과 몽우리가 살짝 드러나 보여 수치심에 쩔쩔매는 어린 소녀가 서있었다. 사춘기가 일찍이 시작된 나는 당황스럽고 불편함 마음, 어서 우리 집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비웃고 놀릴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에 집을 나와 친적집에서 돌아다니는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집과는 다른 이 공간이 신비로웠다. 나와 언니를 환대해 주고 여기저기 구경시켜주던 사촌 언니들과 오빠들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감정이 여러 갈래로 잉태되면서도 그 감정의 실체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느낀 복잡한 감정이 성인이 되어서도 정리되지 않을 때가 많고, 그걸 깨달아 가며 성장하는 과정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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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는 킨셀라 부부를 관찰하면서 자신이 겪은 자신의 부모와의 차이점, 그들 부부에게서 발견되는 이상적인 자아상, 자신의 내면의 가치관들을 쌓아 올리기도 한다.
[ 아저씨 마음속 저 안쪽에서 커다란 문제가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아저씨가 발끝으로 의자 다리를 툭 치더니 나를 본다. " 시내에 나가려면 너도 손이랑 얼굴을 씻어야겠다. " 아저씨가 말한다. " 아빠가 그 정도도 안 가르쳐줬니? " 나는 의자에 앉아서 얼어붙은 채 훨씬 더 심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지만 킬세라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자기가 한 말의 파도에 갇혀서 거기 그대로 서 있다. 아저씨가 몸을 돌리자마자 나는 계단으로 잽싸게 달려가지만 욕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50~51p ]
[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말한다. " 참 조용하네요. 얘는 " " 해야 할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요 " 아저씨가 말한다. 67p]
[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갈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70p ]
맡겨진 소녀는 말을 아끼며 상처를 내려는 마음을 조율하는 킨셀라 아저씨를 , 침묵하지만 행동으로 사랑을 보듬는 에드나 아줌마를 이해하고 그들을 조용히 사랑하게 된다.
[ "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 아저씨가 말한다. "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 72p ]
[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73p ]
맡겨졌던 소녀는 소설의 말미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저편의 다른 세계와 사람들 속에 있던 맡겨진 소녀는 어딘가 달라져 있다. 맡겨진 소녀의 성숙함을 그녀의 진짜 엄마는 본능적으로 감각한다.
조금 자란 키 ,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모유수유를 하는 장면을 보며 갑작스럽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 킨셀라 부부가 사준 옷과 구두, 어린애처럼 들리던 말투가 고쳐진 것을 보며 엄마는 직감한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엄마는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추궁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다. 킨셀라 부부는 단순한 감기에 걸렸을 뿐이라고 소녀가 아주 훌륭하다고 ,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고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따뜻한 당부를 할 뿐이다.
이내 맡겨진 소녀를 원래의 집으로 되돌려 놓으며 급히 발걸음을 올기는 부부지만 소녀는 이 부부를 그냥 보내기가 힘이 들었다. 끝내 달려가 킨셀라 아저씨에게 안기고 , 에드나에게 ' 울지 마요,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라고 속삭이며 에드나의 상실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극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와 지팡이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진짜 아빠를 향해
" 아빠!!! "라고 외치며 경고하는 한편 킨셀라 아저씨에게 " 아빠.. "라고 말하는 장면은
자신이 세운 경계를 넘어오는 가족이지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는 경고로서 목소리를 , 타인이지만 진실된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는 포용으로서 진짜 목소리를 내게 되는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기에 극적 장치가 완벽했다고 본다.
클에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삶에 상처와 결핍의 아픔이 있어도 침묵과 말하기 , 타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과 연결에 대해 마흔한살도 성숙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 시간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