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끝물의 향기
저수지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마을을 가로지르고, 커다란 산과 작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우물처럼 고요한 풍경 속, 버스는 하루에 여섯 번만 찾아오는 아주 작은 시골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IMF가 터지기 전까지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셨다. 집에서 나와 짧은 복도를 지나면, 왼쪽에는 찰흙으로 항아리와 분수대를 만들거나 주물 성형 틀에 찰흙을 넣고 말리는 공장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말린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구워내는 두 대의 가마가 있었다. 공장이자 집이었던 이곳은 늘 습하면서도 포근한 흙내와, 가마에서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가마는 온도 때문에 아버지가 수시로 깨어 도자기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가마가 일하는 날이면 집은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13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임에 다녀오신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셨다. 언니와 나는 미지근하게 식은 도자기를 꺼내 가마를 정리했다. 가마 양쪽을 번갈아가며 도자기를 걷고 나자, 아버지는 큰 칭찬을 해주셨다.
공장 식구였던 아줌마들도 갓 수확한 복숭아를 건네며
> “느그들이 큰일했네. 역시 지 사장 딸들 아니랄까봐 배짱이 좋네.”
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해 주셨다.
언니와 나는 아기 얼굴만 한 복숭아를 내려다보며 군침을 흘렸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복숭아 향, 여기저기 멍들어도 여전히 고운 분홍빛 과일. 엄마는 과일 소쿠리를 보시고
> “그중에 딱딱한 복숭아는 아빠가 좋아하시니까 남겨둬라.”
하시며, 아버지가 딱딱한 복숭아를 좋아하신다는 사실도 알려주셨다.
아버지는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면서 벼농사도 병행하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자기 공장은 부업이고 벼농사가 본업이었던 것 같다. 오남매는 봄이면 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나가, 모판에 흙을 담고 볍씨를 뿌리며 농사 일을 거들었다. 어떤 해에는 논이 질어서 다리가 푹푹 빠지기도 했고, 또 다른 해에는 논이 말라 가볍게 뛰어다니기도 했다. 모판을 가지런히 놓고 볍씨를 뿌린 뒤 비닐로 덮으면, 벼가 자라 흰 쌀밥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진짜 노동은 아버지 차례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이 흥건한 논에 들어가 농약과 비료를 주고, 허리를 숙여 잡초를 뽑으셨다. 날씨가 변덕을 부릴 때마다 논의 물을 조절하며 벼를 키우셨다.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아버지에게선 진흙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논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조금씩 늙어가셨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날이면, 엄마와 우리는 교대로 복숭아밭으로 달려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딱딱한 복숭아를 두 상자씩 사들고 왔다.
우리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먹고 자랐다.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손, 농사와 공장을 오가며 젖은 옷, 그 조용한 무게가 가족의 식탁을 지탱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을 배운 나는, 결혼하며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인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법도 한데, 낯선 곳에서 기혼자로서 삶을 시작하니 사무치게 외로웠다.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 전날, 남편과 나는 신혼집 근처 시장으로 과일 선물을 사러 갔다. 붐비는 과일가게에서 ‘장호원 햇사레 복숭아’ 상자가 눈에 띄었다. 바로 동생들과 교대로 사던 그 과일 상자였다. 상자를 보는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왜 과일을 보면 떠나온 고향이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걸까. 철이 이르게 드는 감을 보면 엄마가 생각나고, 자두를 보면 어린 내가 떠오른다. 복숭아를 보면 딱딱한 복숭아를 한입 크게 베어 물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알이 크고 색이 선명한 딱딱한 백도를 골라 예전 박스에 담고, 보자기 포장을 부탁했다. 정성껏 포장한 과일 상자에서는 어린 날의 여름 향기가 났다. 그날 이후, 매년 여름이 깊어질 때면 복숭아를 사들고 엄마와 아버지를 뵈러 갔다. 우습게도, 복숭아를 보면 아버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듯했다. 식탁 위에는 이미 수북한 복숭아 바구니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리운 고향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그 따뜻한 마음 덕분에, 나는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