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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 사장님 Dec 03. 2023

어머니!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야! 이년아 팬티 다 보인다. 그 꼴로 어디 가냐? 학교 안 가고 술집 나가냐?"

"부모 복 없는 년은 남편 복도 없고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복도 없다더니"

은경이 엄마의 신세한탄 시작이다. 한번 시작되면 좀처럼 끝나지 않는 은경이 엄마의 신세한탄을 피해 은경이는 재빨리 밖으로 몸과 영혼을 피신한다.

은경이 엄마는 결혼 후부터 시작된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으로 은경이가 5살이 되던 해 이혼을 하고 8년째 홀로 은경이를 키우고 있었다. 칼국수집에서 서빙을 하는 은경이 엄마는 은경이를 학교에 보내고 10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은경이 엄마를 만나려면 아침 9시에 방문을 하던지, 밤 10시 넘어 집으로 방문해야 했다. 아동복지기관에서 일하는 나는 부모교육과 상담을 위해 은경이 엄마의 삶 속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은경이 엄마의 삶에서 부모교육과 상담은 사치였다. 은경이 엄마의 출근 전, 퇴근 후 시간에 가정방문을 하였지만 피곤이 역력한 은경이 엄마의 푹 페인 눈꺼풀 앞에 들이민 "당신은 이미 좋은 엄마"라는 부모교육 책자의 제목이 낯간지러웠다.

보통은 은경이 집에 밤 9시 반쯤 방문을 했다. 홀로 라면을 끓여 먹고 방바닥에 누워 핸드폰을 하고 있던 은경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은경이 엄마가 퇴근 후 귀가하면 은경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물음에 피상적인 대답만 오고 갔다. 은경이와 은경이 엄마 모두가 늦은 밤 찾아오는 나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매뉴얼에 따라 한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만나야만 했다.



"쓰앵님, 은경이가 집에 안 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화도 안 받아요"

"제가 지금 갈게요"

그렇게 은경이 엄마와 만난 23시, 함께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실종 또는 가출신고 시 필요한 아이 사진을 찾기 위해 은경이 엄마 핸드폰사진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은경이 엄마 핸드폰 속 사진첩에는 은경이 사진으로 가득했다. 경찰 신고에 필요한 사진으로 초콜릿 라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은경이 사진을 골랐다. 항상 무표정한 모습으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던 은경이의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푹 페인 눈꺼풀로 뒤덮인 은경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쓰앵님, 제가요 오늘 은경이 교복치마가 너무 짧길래 팬티 보인다고 학교 안 가고 술집 나가냐고 악담을 퍼부었지 뭡니까? 그래서 얘가 집에 안 들어오는 것 같아요. 차라리 안 들어오는 거면 얼마나 좋을까요? 치마도 짧은데 나쁜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지요? 은경이가 잘못되면 저는 못 삽니다. 지금까지 은경이 하나 보고 산 건데 은경이 없으면 나는 못살아요."

그렇게 은경이와 함께한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 경찰에서 은경이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은경이를 데려오기 위해 은경이 엄마와 지구대 앞에 도착했다. 지구대 앞에서 은경이 엄마를 붙잡고 "어머니, 절대로 은경이 때리시면 안 됩니다. 걱정한 만큼 할 말도 많으시겠지만 오늘은 하지 마세요. 은경이한테 하고 싶은 말은 저랑 내용을 다듬어서 말합시다."라고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거친 은경이 엄마의 입에서 "네"라는 고분고분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박카스를 사들고 은경이 엄마를 만나러 갔다.

"어머니, 피곤하시지요? 어제 너무 늦게 주무셨잖아요. 저도 너무 피곤해서 박카스 한 병마셨어요. 어머니도 한 병하세요"

"아이고 쓰앵님 우리 모녀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셔서 어쩌나요?"

"아니에요. 어머니가 저한테 전화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 순간 제가 생각나셨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어제 은경이는 잘 잤나요?"

"미친년이 사람 그 걱정을 시켜놓고 잠도 잘 쳐자대요. 쓰앵님이 그냥 자라고 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재웠는데 속에서 천불이 끓어 혼났네요"

"너무 잘하셨어요.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어머니가 약속 지켜주실 거라 믿었어요. 말씀하신 약속은 꼭 지키는 분이시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고 누구나 감정이 올라올 때는 말 안 하는 게 좋아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거든요. 그래도 앞으로 이런 일은 없어야 하니, 은경이에게 가르침을 줘야겠죠? 은경이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싶은지 같이 이야기해 봐요"

"어머니가 어렸을 때 훈육받았던 일화(혼났던)가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초등학교 3학년때인가 동생이랑 동네 동생들이랑 옆집에서 그릇을 가지고 놀다가 깨진 적이 있어요. 그때 엄마가 회초리로 얼마나 때렸는지, 아픈 것보다 억울하더라고요. 혼자만 가지고 놀았던 것도 아니고, 옆집 애가 그릇을 가지고 와서 같이 놀았는데, 나만 제일 큰 언니라고 혼내니 억울하기만 하고 동생이 너무 밉더라고요"

"진짜 억울한 마음이 드셨겠네요. 다 같이 가지고 놀았는데, 제일 큰 언니라고 혼자만 혼나니 얼마나 억울하셨어요. 그때 은경이 할머니가 어머니께 알려주고 싶은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글쎄요. 엄마는 다른 집 물건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 그런 걸 가르쳐주고 싶었을 것 같아요"

"어렸던 어머니가 은경이 할머니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으셨나요?"

"당연히 아니죠. 억울해서 동생이 더 미웠다니까요?"

"그렇네요.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다른 집 물건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 동생들을 잘 돌보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는데, 어머니에게는 억울함만 남았네요. 동생을 더 미워하게 되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머니가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었을까요?"

"다른 집 물건은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 된다고 얘기를 해줘야 알아 들었을 것 같아요"

"너무 훌륭하신 거 아니에요? 바로 그거예요. 가르쳐주고 싶은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요. 오늘 부모교육 최고의 우등생이 탄생합니다. 자 그럼 연습해 볼게요. 어제 은경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나씩 이야기해볼까요?"

야! 이년아! 왜 전화는 안 받고 지랄이야?

고쳐 말하기) 네가 늦게까지 연락도 안되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아서, 엄마가 너무 많이 걱정을 했어. 혹시나 너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엄마에게는 네가 정말 소중한 딸이야.

어린년이 일찍 일찍 다녀야지. 밤늦게 다니다가 험한 꼴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고쳐 말하기) 친구랑 노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중학교 1학년은 저녁 9시까지는 들어와야 해. 그게 규칙이야(귀가시간 같이 정하면 더욱 좋고). 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규칙. 밤에는 술 취한 사람들도 많고,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너 앞으로는 친구랑 놀다가 9시까지는 들어와야 해.

그렇게 고쳐 말하기를 연습하자 은경이 엄마는 입에 붙지 않는다며 부끄러운듯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니까요. 배움이 이렇게나 어려워요. 은경이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이렇게 어렵겠죠? 그런데 너무 훌륭하세요. 40년 넘게 해 왔던 말버릇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그런데 그 어려운 걸 해보려고 시도하시는 것 자체가 정말 멋진 일이에요"

"그러게요. 연습한 대로만 말하면 정말 멋진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나는 글러 먹은 것 같아요. 노력은 해볼게요"



은경이 엄마에게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지 물었다. 당연히 은경이와 함께 한 일화를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은경이 엄마는 혼자 영화 보러 가던 날이 정말 행복했다고 했다. 칼국수집에서 같이 일하는 동생이 기한이 다 되었다며 영화표를 하나 주었는데, 그날따라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아침에 계란프라이해서 은경이 아침식사를 잘 차려주고 배웅도 해주고, 화장을 하고 영화를 보러 갔다고 한다. 그렇게 혼자 영화를 보러 버스 타고 가는 길이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그날 영화를 보고 나와 마트에서 삼겹살을 조금 사가지고 집에 들어와 은경이와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고 했다.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칼국수집 사장 욕을 했더니 "그건 엄마가 이해하라"는 은경이의 충고를 들었는데, 은경이가 잘 큰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그날따라 은경이의 진한 화장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고 한다. 삼겹살을 오물오물 먹는 은경이의 새빨간 입술이 그날따라 예쁘고 귀여웠다고 한다. 다음 쉬는 날에는 은경이와 올리브영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은경이 엄마의 이야기를 듣자 그렇게나 오래 떠들어댔던 이론에 근거한 부모교육 내용이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


"어머니, 많이 행복하세요. 은경이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만나러 왔었는데, 어머니가 행복해야 은경이가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영화도 자주 보시고, 화장도 자주 하시고, 은경이랑 삼겹살도 자주 드세요. 그게 은경이가 행복해지는 일인 것 같아요. 어머니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회복지관과 아동복지기관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이 좀 더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15년 동안 일 하며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엄마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 스스로가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지에 대해 묻고, 그 행복한 시간을 늘리고 빈도를 늘려야 한다. 아이들에게 들이는 노력의 반만이라도 엄마 스스로에게 쏟아야 한다. 아이들을 돌보듯 엄마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이다.

지친 엄마들

화가 난 엄마들 

밑에서는 행복한 아이들이 자랄 수 없다.

엄마가 웃어야 아이들이 웃는다. 행복한 엄마 곁에서 행복한 아이가 자란다.

은경이 엄마가 생각나던 어느 여름날, 엄마들이 편했으면 하는 바람에,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에 식사 준비하는 시간 줄이시라고, 행복한 저녁시간 되시라고, 배송메시지를 썼다.



오늘도 엄마들의 행복을 간절히 빌어본다.


어머니!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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