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어김없이 보타니다운즈프라이머리스쿨 교문 앞 큰 나무 밑, 넓은 그늘에 바람이 좋은 곳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에게 줄 감자튀김도 포장해 온 길이었다. 한 손에 껍질채 튀겨 더욱 바삭하다는 맛집 감자튀김을 들고 기다리고 있자니 아이의 반갑고 환한 표정이 기대되어 내 마음마저 설레었다. 엄마가 반가운지 감자튀김이 반가운지가 뭐가 중할까. 뭐가 됐든 반가우면 되었지.
오늘은 어떤 표정으로 나올까? 한 달 살기 하루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다행히도 2일 차부터는 웃고 나온 날 반, 무표정한 날 반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에게 다가가자 "엄마 집에 바로 가자"며 고개를 떨구고 숙소 방향으로 먼저 걸음을 옮기는 딸아이.
말없이 아이 손을 잡고 비비며 아이를 따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묻고 싶었지만 이내 삼켰다.
감정이 정리되어야만 입을 떼는 아이라는 것을 안다.
주변에 하교하는 친구들이 없어지자 멈춰 서더니 "엄마 안아주세요"라 말한다.
아이는 슬프거나, 불안하면 꼭 안아 달라고 말을 한다. 아이를 꼭 안아주자, 다시금 울먹거리며 무어라 무어라 억울함 가득한 말을 쏟아내는 딸. 흐느낌에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다시 묻지 않았다. 대강 친구랑 싸웠다는 정도는 알아들었다. 그리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 감자튀김과 우유를 간식으로 내어주자, 다시금 안아달란다. 꼭 안아주고 나서는 "아까는 잘 안 들려서 못 들었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이야기해 줄 수 있어?" 하니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잇는다.
프란쎄스가 계속 자기의 연필을 허락 없이 가져가서 썼다. 자기 책상에 침범해서 종이를 올려뒀다. 치워달라고 말했지만 치우지 않아 자기가 종이를 치우려고 하자 책상에 걸려 종이가 찢어졌다. 프란쎄가 화가 나서 연필밥을 자기한테 뿌리고 밀쳤다.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프란쎄가 옆에 있던 친구들에게 일부러 종이를 찢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오셨지만 프란쎄는 자기 잘못은 하나도 말하지 않고 종이가 찢긴 일만 말했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될지 몰라 말은 못 하고 울기만 했다는 딸아이. 그러곤 내일 학교 가기 싫단다.
아이에게
"엄마 같아도 학교 가기 진짜 싫겠다."라고 대꾸를 해주곤" 어떻게 하면 좋은지 잘 생각해 보자"라고 했다. 그리고 "스트레스받는 날엔 먹부림이 최고지!" 라며 우유와 감자튀김을 같이 먹었다.
간식을 다 먹은 아이가 호윅비치에 가잖다. 평소에는 맨날 바닷가 가냐며 엄마 다리 다 탔어라고 핀잔을 줬겠지만 기분 안 좋은 날, 무언가를 하자는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물과 수건, 갈매기에게 줄 과자를 챙기고 호윅비치로 따라나섰다. 호윅비치에 도착하자마자 과자를 들고 갈매기한테 뛰어간 아이는 과자를 한 번에 많이 뿌리는 법이 없다. 하나씩 하나씩. 갈매기에게 과자를 주고는 뛰어와 "엄마, 엄마, 저 욕심 많은 갈매기가 과자 3/5을 먹었어." 분수를 배우고는 분수로 가늠할 때마다 똑똑하다고 칭찬을 해줬더니 분수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녀다. 이내 욕심갈매기를 골탕 먹이기 위해 조개를 주워다가 과자인척하며 던진다. 조개를 향해 달려오다 방향을 튼 갈매기를 보고는 "우와 쟤는 속지도 않네"란다. 10년 남짓 살아온 아이는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대로 선과 악을 구분해내고 있었다. 아이가 생각하는 선이란 한 명이 누리는 일방적인 혜택이 아니라 얘 한 번이면, 쟤 한 번식의 공평함 같은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실컷 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엄마, 이제 학교 얼마나 남았지? 2일만 다니면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그냥 2일만 참으면서 다녀야겠다."
"봄이야. 참는 게 좋은 건 아니야. 엄마 생각에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담임 선생님께 전부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아. 말로 하기 힘드니 엄마가 메일로 써볼게"
"아니야. 엄마 말하지 말아 줘. 만약에 프란쎄가 또 그러면 내가 한국인 선생님 찾아가서 말할게" 제법 비장한 그녀의 각오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
"그래.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미시즈톰슨한테 엄마한테 전화 걸어달라고 해. 엄마가 바로 올게. 그리고 봄이야. 엄마가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님이라고 있다고 했지? 그 작가님이 에세이에 쓰셨는데 미운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찾아보래. 그럼 네 속이 편하고 네가 예뻐질 거래(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_박완서)"
"엄마, 프란쎄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어. 김정은(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북한지도자) 같아"
"세상에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데. 만약 찾게 되면 알려줘,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예뻐진다고 하니 한번 찾아봐봐"
그렇게 그날의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다행히 다음날 아이는 학교에 갔다.
아이는 경계가 확실한 편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선을 넘는 것도 꽤나 불편해한다. 자신의 물건을 빌려주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애초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빌리기 싫어하기에 자기의 물건을 잘 챙긴다. 매번 외출 때마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그 어머니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이의 그런 성질은 아주 어려서부터 티가 났다. 자기의 장난감을 빼앗기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서른 평생을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어미의 눈에는 아이의 그런 모습이 걱정되었다. 사실은 또래 친구 엄마들의 눈치가 보였다.
조금 더 살아보니 마냥 양보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요.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담아내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박완서 작가님의 미운 사람 좋은 점 찾기를 말해준 이유는 이타심과 같은 고차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에너지를 아이의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바람에서다. 그냥 내 자식 속이 좀 편했으면 하는 바람. 좁은 마음이라 해도 별 수 없다. 다만 스스로 자기 마음을 지켜가는 방법을 배워갔으면 한다.
좁은 마음에서는 그저 말이 안 통해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자기감정 잘 추스르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생각해 낸 아이가 기특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를 제대로 해라.' 또는 '프란쎄를 엄마가 혼내줄까'라는 말도 안 되고 들어먹지도 않을 채근을 하지 않고 입닫은 나도 제법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