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을 바쁜 걸음으로 내려온다. 저 아래에서 여자아이와 엄마가 막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다.
어른에게는 별 것도 아닌 한 칸의 계단 높이지만 아이는 온 힘을 다해 무릎을 들어 올려야 한 칸 한 칸 올라오는 게 보인다.
어느 엄마도 그렇겠지만 혼자서 밖에서 마주치는 내 아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그냥 지나가는 배경처럼 보이지 않고 한번 더 쳐다보게 된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엄마는 올라오고 나는 내려가면서 가까워질 무렵 그들의 대화가 들린다.
그들의 대화라고 해봐야 엄마 혼자만의 대화이긴 하다.
아이 엄마는 한 칸 한 칸 올라오면서 하나, 둘, 세엣. 넷~ 숫자를 붙여가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몇 번 하고 끝낼 줄 았았는데 열둘, 열셋..... 계속 이어진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 아직도 숫자 세기가 계속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끄러미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끝까지 오르도록 이어지는 말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숫자는 계속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듣는지 마는지, 흥미가 있는지는 크게 상관은 없이 엄마의 집요한 숫자 세기 의식 속의계단 오르기를 보니 '피식'웃음이 났다.
'놀이를 가장한 숫자 교육이 하고 싶구나,, 저 엄마..'
내가 첫 아이를 키우던 때가 생각났다.
나도 육아서를 섭렵하고 책에서 시킨 대로만 아이를 키우려고 했다.
오감놀이, 동화구연처럼 책 읽어주기, 아이와 있을 때 수다쟁이 엄마 되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많은 걸 주입하고 싶어 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직무를 유기하는 엄마가 되는 것처럼, 나는 좋은 엄마라는 프레임을 비뚤어지게 가지고 있었다.
자꾸만 아이에게 설명하고 정보를 줘야 할것같았다.
사실, 그때는 뭔가에 잘못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우리 아기 오늘은 꽃무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을까? 와~ 꽃냄새가 참 좋지?"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말을 시작하기 전까지 수없이 설명하고 표현해줬다.
'엄마의 언어가 곧 아이의 언어다.'
어떤 아동 교육학 박사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좀 힘들어서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감수하는 게나의 소임을 잘해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와~ 이건 뭐야? 예쁜아? 빨~간 색이네! 딸기같이 맛있는 빠알간색~~"하면서늘 놀이를 가장한 정보를 슬쩍 끼워 넣었다.
우리 아이는 둘 다 '유아어'를 건너뛰고 바로 말을 했다.
아이라고 밥을 '맘마'로 먼저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책을 보고 얼마나 신경 써서 알려줬는지 첫째는 15개월에 '할머니'란 단어를 구사했다. 할~, 도 '할미'도 아닌 '할머니'부터 나오는 빨라도 너무 빠른 아이의 언어발달을 보면서 나의 '육아서 육아'는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미소 지었다.
난 공부에 극성인 엄마는 아니고 인성, 감성, 창의력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거라고 세뇌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내 아이가 좀 남다르면 좋지 않을까? 검은 속내가 솔직히 있었음을 이제는 인정한다.
그런데 유별난 엄마의 시간도 길지 못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원초적 본능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소위 말해서 멘탈이 탈탈 털렸다. 선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교육적 육아의 막'은 어이없게 내려졌지만 의외의 수혜자가 생겼다.
바로, 둘째...
둘째가 자라나는 걸 보면서 별 다른 걸 해주지도 않고 일부러 경험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때가 되면 다 하더라는 걸 조금은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야생의 거친 말처럼 부딪히고 배워 습득하는 근성이 더 있어 보였다.
육아(育兒)는 말 그대로 아이를 기르는 것인데 난 왜 교육(敎育) 아만 하려고만 애를 썼을까...
요즘 웬만하면 아이들에게 고쳐주지 않는 말들이 있다.
너무 예쁜 육아기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말을 예고 없는 선물처럼 받을 때가 그렇다. 일부러 바른말로 알려주지 않고 그 소중한 추억을 남편에게 잘 싸서 퍼다 나르고 잊지 않으려고 기록해둔다.
아이만의 상상력이 잔뜩 묻은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너무 아쉬워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