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자매.
한 부모에서 태어났다는 생물학적 요인 하나만으로 무리 안에서 약육강식을 경험하며 경쟁 구도를 체득하는 관계이다. 물론 부모는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꿈꾸며 자녀를 낳겠지만 현실은 시기와 질투, 때론 인정받기 위한 모함과 부조리를 맨 처음 배우게 되는 사이다. 어떤 집단이든 구성원의 의견이 만장일치되는 일은 잘 없다. 친구든, 나라든, 가정 안에서든.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나눠가지는 자매가 다른 취향과 기질을 가졌다면 축하한다. 상대의 선택에 이유 없는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 놀부 심보도 배울 수 있다.
싫어.
너무 싫어.
제일 싫어.
우리 집에 사는 두 아이도 서로에게 이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치열하게 다투던 유아 시절을 지나 어깨에 같은 무게를 짊어진 초등학생이 되고 나니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잡기 놀이, 인형 놀이만 같이 해도 즐거운 시기는 큰 아이가 열한 살을 넘어가니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린이, 초등학생이라는 말로 같이 묶여있지만, 블루안에 베이비 블루와 코발트블루가 같은 파랑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장난감 같은 일차적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고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존중되는지에 대한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다. 역사를 좋아하는 큰 아이의 호기심과 흥미를 채워주기 위한 나들이, 체험의 비중이 늘어나자, 둘째는 싫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가족 여행 계획을 세우면 한 군데씩은 유적이나, 박물관을 포함하다 보니 가족 여행 자체를 가기 싫다고도 했다. 다리 아프고 재미가 없다는 이유지만 어쩐지 언니가 좋아하는 모습이 내심 마음에 안 들었던 것도 같다.
"불국사? 박물관 같은 거야? 지루해. 싫어."
경주 가족여행을 계획하는 과정부터 말로 재를 뿌린다. 불국사 역사 체험수업을 신청했다는 말에 두 아이 반응이 흑과 백처럼 다르다. 큰 아이는 좋아서 폴짝폴짝 날뛰고 둘째는 얼굴 위에 회색 빗금이 쳐있다. 갖은 설득과 회유의 말도 해보고 혼자 집에 있으라고 반협박하다 보니 가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꼭 언니의 취향 위주가 아니라 이제 충분히 감상하고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데 덮어놓고 싫다하니 부모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경주에 가서 불국사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왜 거기 가야 하냐는 말을 반복했다. 입이 나와 차에서 내리는 아이에게 급하게 간식으로 협상을 해본다.이왕이면 기분 좋게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딱 관광지스러운 먹거리 좌판에서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달고나를 받아 들고야 찌푸린 미간을 폈다.
신청한 역사 수업은 아이들만 해설 선생님과 함께 유적을 2시간 정도 돌아보며 설명을 듣는 것이다. 미리 연락받은 대로 정문 앞에 서있으니 깃발을 든 선생님이 보였다. 함께 팀이 될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5명이 팀이 되어 선생님을 따라 소나무 아래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의 일정을 듣는 모습을 멀찌기서 바라보다가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손을 잡고 사찰을 돌아봤다. 평소라면 아이들 사진 찍기 바빴을 텐데 카메라에 서로의 모습을 담아주는 여유를 부렸다.
약속된 두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관람을 마치고 청운교, 백운교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고 해산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예상했던 표정과 다른 첫째와 둘째가 다가온다.
너무 기대된다던 첫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다보탑, 3층석탑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고 울상이었다. 그런데 지루해 죽을 뻔했다고 입을 내밀줄 알았던 둘째는 예상밖으로 재미있었다고 했다. 다보탑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불국사로 들어가자는 말에도 큰 반항이 없었다. 드디어 역사에 관심이 생긴 건가 내심 기뻤다.
" 그것 봐. 막상 가서 들으면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재밌을 거라고 했잖아. 엄마 말 듣기를 잘했지? " 드디어 역사의 재미를 느낀 것인가 현실 초등의 엄마의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러나 아이의 일기에 남겨진 진실은 달랐다.
불국사 (10월 13일)
토요일에 불국사에 갔다.
돌도 쌓고 부처님도 보고 달고나 먹고 선생님과 2시간 동안이나 수업을 했다. 소원도 빌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루어진 소원을 알려주셨다. 바로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소원을 여자랑 사귀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고백을 하러 갔는데 그 여자도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이다. 쌤은 여자와 결혼이 하고 싶다고 한다. 너무나 로맨틱하다. 그리고 쌤이 잘 생긴 것 같다. / 불국사에서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금동아미타불좌상을 봤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손동작이 이렇게(위로 향하고) 다른 손으로 감싸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역사가 이렇게 까지 재미있는지 몰랐다. 역사 짱.
불국사에 가서 재미있었던 이유는 해설 선생님이 잘 생겼고 짝사랑 이야기를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키가 큰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아홉 살 눈에는 잘 생겨 보였 나보다.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였기 때문에 맞춤법 점검을 해주는데 일기를 읽고는 헛웃음이 났다. 잘생겼다는 말고 차마 끝내기도 난감했다.
" 저, 불국사에서 봤던 유물이나 느낌 같은 건 없니?"
손동작이 특이했던 불상을 이야기하길래 이름이라도 제대로 써보라고 받아온 팸플렛을 밀어줬다. 제목은 불국사지만 불국사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갈 뻔한 일기는 엄마의 조작에 가까운 코칭이 들어가고 마무리가 되었다. 사실 글쓰기 관점에서 보면 경험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쓴 것이니 틀린 건 아니다.
'역사를 배울 수 있어서',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이 이렇게 정교하고 우수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니!'라고 썼더라면 아이의 진짜 감상이었을까? 아이의 눈으로는 좀 큰 탑 옆에 또 돌로 만든 탑, 어디가 멋진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계단, 각각의 방에 들어가 있는 조금씩 모습이 다른 불상, 재밌는 건 하나 없는데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붐비는 곳일지도 모른다. 내심 아이에게 학습된 소감, 감상을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의 감상은 날 것이지만 진실인 것은 확실하다.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았고 그 짝사랑 이야기가 재밌었다. 그러니 불국사에서 보낸 시간은 재밌었다. 그것이 그날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