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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Mar 01. 2020

아버지! 왜 가훈을 그렇게 정하셨어요?(2)

남의 덕 좀 보고 삽시다.

'쓰미마셍' , '익스큐즈미'가 입에 밴 민족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실례를 하는 건지..

그놈의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게 도대체 뭘까?


어릴 때, 어른들 사이에서 우주를 떠다니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부모님의 지인들이 집에 거나, 어떤 장소에서 만났을 때 주로 그랬다.


어디서 배운 듯, 인사의 마지막은 늘  만 원짜리 한 장으로 끝이 났을까?


'기승전(돈 전:錢) '은  '결'이 아니라 언제나 '어색함'이었다.

 

문 앞에서 배꼽인사를 하고 나면 그 긴장의 시간이 온다.

손님의 손이 바지 뒷 춤 주머니로 가는 액션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결말을 예상했다.


지갑 속에서 세종대왕님이 삐죽 튀어나오려 준비를 하기도 전에 이미 부모님의 손사래가 나가 있었다.

"아휴, 애한테 무슨 돈이에요!" 하는 애창곡 18번 같은 말과 함께.


그렇다고 지갑에서 빠져나온 돈이 도로 들어갈 리 만무한데 사양만이  살 길인 듯 격렬하게(?) 거부했다.

이손 저손 갈 곳 잃은 돈은 몇 차례 공중을 표류했고 내 눈도, 입꼬리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우주를 떠다니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이 돈을 받고 싶은 표정이어야 하는 걸까?

싫은 표정이어야 하는 걸까?


솔직하게 말하면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고는 돈이 나에게 왔기 때문에 기쁜 일이다.

하지만 남이 주는 돈이라는 불편함이 학습되어 있었기에  좋은 표정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돈을 보고 경멸하거나 질색하는 것도 아니질 않나!


가장 적절한 건 난감한 표정이겠지만 어린아이에게 그런 고난도 표정을 연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폭탄 돌리기를 하듯 수차례 주고받고를 하다가 기어이 그 돈을 내 손에 억지로 쥐어줬을 때,

그 난감한 나의 얼굴은 지금 떠올려도 털이 쭈삣 서게 어색하다.


그때의 나의 표정 연기는 정직한 것이었을까?





내가 나이를 먹고 생각해보니 적당히 한 두 번 사양의 뜻을 비치고  좀 받았어도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온 적처럼 그 돈에 대항해야 했을까?

그 사람도 줄만해서 줬을 거라는 걸 지금은 알겠다.


"이런 게 다 빚이다"하면서 돈을 받고도 뭔가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늘 느끼게 했다.

먼저 내어주는 것은 그리도 가르쳤으면서, 기꺼이 받는 건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런 경험들이  차곡히 쌓여서 나를 만들어갔다.




나는 칭찬을 잘 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하는 칭찬에 겸손으로 응하는 게 공식처럼 나왔고 그 공식은 조금은 낮은 자존감으로 풀이되었다.


나는 도움을 잘 요청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뭔가 모르는 게 나타났을 때 주저함 없이 물어보면 사실, 시간도 절약되는데 "이것 좀 도와줘!"라고 하는 게 그 사람의 시간을 뺏는 거라고 생각했다.

모르면 배우면 되지! 하고 혼자 이것저것 끙끙거리면 해결해 보았고 뛰어난 문제해결력을 얻었지만 자존심 센 사람이란 평판도 같이 가졌다.


나는 남의 덕은 못 보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의 덕을 보는 건 사실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네 덕(?)을 갚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성격은 내 지갑을 늘 빈곤하게 만들었다.

지금이야  내 주변엔 나와 맞는 사람들만 남은 내 삶이 중심인 나이이지만 어릴 적엔 그렇지 않았다.


다양한 인격의 사람들을 만났고 다들 어린 나이였기에  남의 덕을 태생적으로 잘 보는(?) 사람도 만났다.

늘 자꾸 손해 보는 느낌인 내게 생글거리면서 '미안', '고마워'가 잘 나오는 사람들은 이득보다 손해가 마음이 편한 내 성격에 기생했다.


이 성격의 완결판은 직장인이 되고 나서였다.

회사에 왔으면 밥값을 해야지 꽁으로 돈을 받아가서는 안된다는 사명을 가지게 했다.


그 역사적 사명이 나를 분골쇄신해서 몸 바쳐 일하게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노동청에 당장 달려가야 할 업무를 해내면서도 그걸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깟 사표 한 장 손에 들고 '나 못하겠소!' 해버리면 되는 거였는데 출근길에 다리가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다녔다니 웃픈 일이다.




왜 우리 아버지는 좀 적당히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걸 알려주시지 않았을까?

본인도 시계처럼 완벽하게 사는 것도 아니셨는데 말이다.

허름한 형편에 그 마음 하나만은 꼿꼿한 자존심으로 세워두고 싶으셨나 보다.


'남의 덕 좀 보면 정직하지 않은 건가요?'

이제 머리가 컸다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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