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숨긴 내향성

by 맵다 쓰다

별생각 없이 책 속의 테스트 문항을 체크했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일까?


하나, 둘 항목을 넘어가면서 손가락을 꼽아봤다..


7개가 해당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책에서 그동안 설명되지

않았던 내 행동과 감정의 원인을 수시로 마주쳤다.


내 나이 마흔,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내향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어디 가면 사교적이란 말을 듣기에 결과가 의외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주문 맞춤한 외향인 옷을 입어서 어색한 줄 몰랐을 뿐 내향적 인간이다.



8살 때 내가 좋아했던 얼굴이 하얀 남자아이와 짝이 된 적이 있다. 부끄러워 앉지 못하고 주저했더니 선생님이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짝을 바꿔주셨던 기억이 있는 부끄럼 많고 눈물 많은 아이였다.


무리 생활에서 재밌고 밝은 성격이 유리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스스로를 사회적 사람으로 개조시켜왔다.


책에 나오는 '사회성 버튼'을 필요할 때마다 누르란 것처럼 난 연습하고 개조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켜고 끄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성 LED'을 켜고 살았다.


눈이 부시게 밝고 값싸게 전기를 불러오고 일반 전등보다 오래가지만 수명이 다하면 램프 하나가 아닌 전체를 교체해야 하는 단점이 있는 LED램프..


어려운 삶의 순간엔 에너지가 바닥까지 내려가는 감정의 다운으로 아무와도 만나기 싫을 때가 온다.

나의 LED 전등 교체시기가 된 것이다.


새 전등을 달듯 정체성을 재정의해줘야

소진된 나의 옷을 버리고 새롭게 사회성 성향을 잘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철이 들었나 봐..

이제껏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았거든.. 앞으로 좀 겸손한 삶을 살려고.."


그녀가 앞집으로 이사 오고 거의 일 년쯤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차가운 맥주캔을 탁자에 올려두고 보글거리는 탄산이 빠지도록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는 엄마가 되면서 자기만 봐온 삶에서 졸업하고 싶다고 했다.

몇 살 어린 나였지만 직감적으로 반대의 성향이라는 게 감지가 되었다는 말과 함께..


가만히 듣던 나는 말을 꺼냈다.

"나는.. 언니가 말한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 나만을 너무 사랑하는 삶.. 웃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나 또라이 같은 사람이 돼보고 싶어!"



하란대로 안 할 배짱이 있는 사람!

잘못돼도 내 인생인데 뭐 어때? 쿨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

나는 특별하다고 소중히 아껴주는 자기애가 흘러넘치는 사람.

아이보다 내가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그녀는 내가 그려봤던 미지의 모습과 같았다.


그 당시 나는 머릿속이 '자기애'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차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이 너무 보여줘서 이제 식상하게 느낄 그 말 '내가 없는 기분'

꼬집어 말하면 몸은 있고 안의 내가 없다는 말이 맞다.

있지만 없는.. 몸이 투명으로 변하는 도깨비 망토를 쓰고 열심히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재우다 '아! 오늘 일반쓰레기...' 하면서 황급히 일어나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문을 나서다가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온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목이 늘어난 볼품없는 티셔츠, 헝클어진 머리, 윤기 없는 얼굴... 눈인사에는 서로에게 보내는 애잔함이 묻어있었다.


문 넘어 아이와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리면 보이지 않는 위로를 서로에게 보냈다. 저기서도 혼돈의 시간이 벌어지고 있구나 짐작하면서 그렇게 가까워졌다.

그녀와 나는 양쪽 끝에서 서있다가 중간쯤이 돼서 마주쳤다.

공통점 없는 사고방식으로 살았지만 만난 그 시점에 묘하게 고민이 닮아있었다.

나는 저쪽을 보고, 또 그녀는 이쪽을 보고 서 있다는 것만 다를 뿐...


그러고 보면 어느 삶도 후회가 생긴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모습이라도 삶의 시곗바늘로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영원히 1시도, 12시도 아니다.


그 묘한 동질감은 서로를 터널에서 꺼내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마주 보고 선만큼 터널을 빠져나오는 방법의 격차를 절감했다.


"넌 좀 이렇게 움직여야지 막 활력이 돌지!" 하면서 운동을 권하고 혼자 숨어있는 걸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난 3보 1배처럼 3번쯤 발산했다면 1번은 온전히 나에게 에너지를 쏟는 시간이 있어야 완충이 가능한 인간이었다.


나는 온종일 현관문이 여닫히고 운전 중에도 쉬지 않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육아의 우울증으로 음지식물처럼 있는 내게 자꾸 양지를 권했지만 끝끝내 나는 음지에 남아있었다.

잠시의 에너지 충전은 기운을 나게 했지만 오른 만큼 원래 상태로 돌아갈 때 낙차가 마음을 더 텅 비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나는 나의 방식대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는 땀 흘리고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나는 멍하니 생각을 흘리고 내 속에 나를 만나고..


어떤 사람은 에너지를 발산해야 해소가 되고 또 안으로 수렴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쁘고 가 아닌 각자의 방식이 있다.

내 옷이 아니였으니까.. 내게는 맞지 않았다.


내 사회성 버튼은 계속 눌러 켜진지 꺼졌는지 모른 체 살아왔지만 나를 위로하는 방식은 오롯이 내향인의 그것이었다.


LED램프의 발명만큼 내 사회성이 놀라운 기술의 발전을 이뤘지만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