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전시사항
모든 게 예민했다.
제대로 밥을 차려 먹을 수도 없어 서서 대충 먹고 살기 시작했고 샤워를 하는 시간도 화장실문을 반쯤 열어두고 아이가 울면 뛰어갈 준비를 하고 했다.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에 반응하게 셋팅된 내 귀는 늘 울음소리에 즉각 행동이 나오도록 전보를 친다
분유를 먹이기 위해 사투할 때 말고는 아이를 울리면 안된다고 생각건지
그 울.음.소.리 가 너무도 귀에 거슬린건지...
내 모든 건 아이를 위해 존재했다.
잠이 들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남편이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잠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일 열 서너시간을 자던 나는 이제 자면서도 귀를 열어두었다.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다 모로 누워 쪽잠을 자는 자세로...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좀 울려도 된다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그 "좀"이 어디까지 울려야 되고 아닌지도 몰랐다.
이렇게 참고 맞추는 것에 특화된 나는
육아도 아이에게 맞춰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읽은 육아서에는 어릴 땐 아이의 욕구에 잘 반응해주면서 교감하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고 했다.
정해진 시간에 재우고 먹이고 놀아주고 일정한 루틴으로 생활리듬을 주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늦게 까지 이어지는 자리로 외출하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이는 일정한 루틴으로 습관이 자리잡아가고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내 손에서 까다롭게 키워지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전시사항이다”
아이를 위한 희생이 당연하다 라고 혹독하게 나는 몰아쳐가고 있었다.
육아는 희생이 아니고
살아가는 인생인 것을 그 때는 보이지 않았다
# 기한이라는 것
한마디로 나는 유난이였다.
아이가 저체중2%의 아이라서 잘 먹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데 아이는 일관되게 모유부터 이유식까지 쭉 안먹어줬다.
유리로 된 이유식 용기를 항상 열탕 소독하고 다짐육을 못믿어 덩어리 고기를 사서 손으로 믹서가 아닌 칼날로 다져서 이유식을 직접해야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하던 모유 수유를 13개월까지 지속했다.
영양사출신인 내 직업의 이점을 살려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최고의 것만 주고 싶었다.
육아서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었줬다.
책에 나온대로 아이에게 참 많이 말을 해주었고
“우리아기 이제 기저귀 갈꺼예요~” 알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주저리주저리 말도 참 잘했다
하루라도 씻기지 않으면 아이에게 큰일이 나는 줄 알아서 매일 목욕을 씻겨야 했고 세탁기 속이 못미더워 10개월까지 손빨래를 해서 옷을 삶았고 물수건 대신 가제 손수건을 삶아 써야했다
이유식을 하면서 조금은 줄었지만 여전히 하루에도 6~7번씩 물똥누는 아기 덕에 매번 물로 뒤처리를 하느라 내 손목은 남아나질 않았다
나는 그때 육아휴직상태였다.
스스로도 모르게 마음속에 기한이라는 걸 정했나 보다. 회사에 복직하게 되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한 것 같다.
마치 시험기간 전에 잠을 줄이고 보고 싶은 티비도 안보고 공부하는 기간으로 정하는 것 마냥
육아도 그렇게 벼락치기가 가능한 줄 알았다.
육아 휴직인 상태일 때만 나는 육아를 하는 줄 알았나보다.
그때는..
# 엄마와 안경
눈이 많이 나쁜 나는 자주 안경을 쓴 채로 잠이 들었다. 자다가 아이가 울면 바로바로 어둠속에서 아이를 확인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늘 잠들 채비를 못하고 잠이 들었다 깼다 말았다를 했다.
아이가 8개월쯤이였던 걸로 기억된다
아침에 나보다 먼저 눈을 뜬 아이는 먼저 깨서 낑낑거리며 꼼지락 거렸다. 그러더니 내 주변에 떨어져있는 안경을 손에 쥐고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뭐? 엄마 끼라고?”
이 말을 했을 때 신랑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이 아닌 매일 아침 나보다 먼저 깨면 안경을 찾아서 줬다.
그렇게 교감 교감을 부르짖으면서 아이를 인격을 존중해주니
'세상에! 8개월 아기가 모닝콜로 엄마 안경을 찾아주다니!!'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으니 기질은 까다롭더라도 말도 빠르고 엄마인 나와 교감이 잘 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나 잘하고 있어!'
그렇게 혼자만의 육아의 성을 쌓아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