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
오늘은 마음이 참 분주합니다.
벽에 걸린 어머님 사진을 보며 “어머님” 하고 부르려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립니다. 옆에 서 있던 아들이 “엄마” 하며 제 손을 꼭 잡아줍니다.
어머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아시지요?
언제나 하는 인사지만 새로 찧은 쌀로 밥을 지어 어머님의 사진 앞에 차려놓고 절을 합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힘든 농사에도 논밭을 남의 손에 넘기지 않고 평생 지키셨지요.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 햇볕에 말리고, 하나하나 손으로 가루를 만들어 묵을 쑤시던 그 손길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막내딸인 제가 고기와 비린 것을 못 먹는다며 김장김치 10 포기를 따로 담아주셨죠.
어머님의 손맛은 아직도 제 입안에 남아있습니다.
어머니, 지금은 손에 쥐고 있지만, 당신은 없으시네요. 너무 보고 싶습니다.
2009년 고추와 도토리를 왜 그리 많이 수확하셨나요?
우리 마음은 노년이 좀 더 편하시길 바랐는데… 폐암이라는 병을 앓으시고도 힘겨운 8개월을 견디셨지요.
아버지와 오빠, 언니도 원망했어요.
복수에 물이 차서 갈비뼈를 마취 없이 뚫었다는 소식에 눈물만 흘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안아주며 “아프지 않다, 울지 말라” 하셨지만 저는 하느님께 기도하며 간절히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치료를 더 이상 못한다고 하셨고, 아버지 뜻에 따라 연천 고향으로 모셨습니다.
집으로 모신 지 3일째, 어머니를 안고 “엄마 잘 견뎌줘서 고마워” 하며 출근길에 올랐는데,
학교에 도착하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순옥아, 엄마 떠나셨다.”
너무 무섭고 두려워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도 저의 슬픔을 아시고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어머니 방에 들어가자 덮던 이불로 얼굴을 가려놓으셨습니다.
엄마, 떠나시면 안 돼요, 울면서 손을 잡았습니다.
어머니 떠나시기 전에 부르신 ‘아리랑 고개’가 귓가에 맴돕니다.
사진 속 어머님은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계시지요.
어머님, 많이 잡수세요.
아버지는 점점 기력이 쇠해지십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입으시던 옷들은 이제 너무 커졌고, 허리도 많이 줄었습니다.
아버지 건강 회복되시길 바라고 살펴주세요.
창가에서 본 하늘은 아름답습니다.
여름이 떠나는 게 아쉽지만, 이제 가슴을 활짝 열고 작별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가을엔 감악산 출퇴근길에 그리운 어머니 얼굴을 떠올릴 겁니다.
낙엽은 하염없이 나뒹굴며 길을 열어주고, 하얀 눈도 언젠가 선물할 거예요.
그 햇살과 향기로운 가을 속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차 한 잔, 어머니께는 달달한 커피 한 잔 타드릴게요.
엄마, 보고 싶어요.
이 아프고 힘든 시간을 엄마께 전하고, 가슴에 매달려 울고 싶습니다.
엄마,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시간만 흘려보내는 제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같이 느껴집니다.
하늘에 계신 엄마, 저에게 걸어갈 길을 알려주세요.
아무 방법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6년 전 뇌졸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이번에 전립선암 의심 소견으로 입원하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휠체어에 모시고 다니는 게 힘들지만, 저는 눈물이 나도 꾹 참았습니다.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은 왜 이렇게 떨리고 조바심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직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교수님 설명도 잘 못 알아듣는 아버지는 “괜찮은 거죠?”를 계속 묻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가 갈비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갈빗집에 갔습니다.
양념갈비, 잡채, 샐러드, 두부조림, 오이피클, 돼지껍데기까지 푸짐하게 차려졌습니다.
돼지껍데기는 제가 못 먹으니 따로 달라고 했죠.
“아버지, 돼지껍데기 드실래요?”
“응.”
아버지는 22살 카투사 시절 많이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는다고 맛있다며 좋아하셨습니다.
잡채를 왜 그리 좋아하시냐고 물으면 “고기 먹어라” 하시고, 제가 안 먹으면 고기 한 점 집어 주십니다.
눈물이 나 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나오는 길에 로또 판매점이 보여 5천 원어치 두 장을 샀습니다. 아버지와 한 장씩 나눠 들었죠.
“아버지, 1등 되시면 뭐 하실 거예요?”
“이 막내딸에게 다 주겠다.”
농담 같은 말씀이었지만, 노년이 여유롭고 건강하시길 바라는 제 마음은 그보다 더 간절했습니다. 자유로를 달리며 기도하는데,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습니다.
약국에서 약을 타는 동안 CBS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습니다.
“우리 아버지 84세이시고, 병원 다녀오는 길에 행복한 식사도 했습니다. 아버지 건강 회복을 응원해 주세요.”
며칠 뒤 사연이 당첨되어 우쿨렐레가 도착하면, 아버지께 한 수 배우고 정수라 님의 ‘아버지의 의자’를 반주해 드릴 계획입니다.
2015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중환자실에 두 달이나 계실 때 저는 매일 병원에 찾아가 말벗이 되어드리고, 굳은 몸을 주물러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늘 “막내딸이 최고다” 하시며 모든 재산을 다 주겠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저 건강만 회복되길 바랐습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죽어도 안 간다. 집, 내 집, 고향집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결국 집으로 모시게 되었고, 거동이 불편하고 매운 음식조차 드실 수 없는 아버지를 위해 연화제를 밥에 섞어 드리며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조금씩 기운을 되찾아 가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제게 눈물겹도록 큰 기쁨이었습니다.
제가 “재산 언제 주실 거냐?” 물으면 아버지는 웃으며 “조금 더 있다가” 하시며 농담을 하셨죠.
아버지의 일상은 늘 똑같다며 쓸쓸함을 토로하십니다.
친구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나 아버지는 “나는 몇 번째일까” 하시며 외로워하십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굽지 않고, 쓸쓸함보단 따뜻함이 전해지길 막내딸은 간절히 바랍니다.
주말에는 시각장애인 분이 운영하는 지압원에 모시고, 영양제도 맞으러 갈 예정입니다.
키 170에 50킬로, 휘청거리는 아버지, 기력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는 25살 꽃미남이었다고 합니다.
동네에서는 새색시 꽃미남, 카투사 시절에는 기타와 수영도 잘하는 근육질 남자였답니다.
27살 아버지와 23살 어머니의 중매 첫 만남에 어머니가 “너무 예쁜 남자”라며 반했다고 하셨지요.
저도 늘 영화배우보다 잘생긴 아버지를 자랑했습니다.
싸이월드, 블로그, 카카오스토리, 카톡에 아버지 사진을 많이 올렸고 댓글에 “정말 잘생기셨다”라고 하면 아버지가 좋아하셨죠.
오늘 하루는 분주했고, 웃음과 눈물과 사랑이 교차한 긴 하루였습니다.
어머니, 오늘 제를 올리니 아버지 곁에 오셔서 아버지를 응원해 주시고 안아주세요.
그리고 제 곁에도 오셔서 저를 안아주세요.
엄마, 사랑합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