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그리움의 기록
프롤로그: 가을, 이별의 계절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 들녘마다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고 가족이 함께 모여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한가위가 찾아온다.
하지만 내게 이 계절은 단순히 기쁨과 풍요로움만을 전해주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풍요로움과는 달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와의 이별을 서서히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벼 이삭처럼, 나의 마음도 아릿하게 흔들렸지만, 그 슬픔을 억누르며 하루하루 아버지의 숨결과 눈빛을 더 깊이 새기고 싶었다.
어제까지 당연했던 일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한 하루를 기록하려 한다.
이 글이 언젠가 내 삶의 버팀목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본문: 아버지의 기억과 첫사랑, 그리고 가족
아버지는 파주 금촌에서 태어나셨다.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를 안고 연천 시골로 옮겨 한평생을 보내셨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생각했다.
‘금촌에 남았다면 조금 더 평온했을까?’
금촌에서는 토지 보상으로 재산을 얻은 집안도 있었지만, 돈이 많다고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재산이 가족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로 웃곤 했다.
‘돈이 많다는 건 나쁘지 않겠지.’
힘든 시골 생활이 우리 가족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기억을 따라가며, 아버지의 첫사랑이자 한 시대의 추억인 우정자 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의 군 시절, 카츄사에서
아버지는 젊은 시절 평택 카츄사에서 군 복무를 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군 생활의 단조로운 하루 속에서도 동료들과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특히 군 동기였던 성종 씨와는 자주 함께 생활하며 서로 의지했다.
성종 씨는 아버지에게 평택과 주변을 안내하며, 군대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군 생활은 단순히 규율을 배우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훈련장에서 체력을 다지며, 쉬는 날이면 동료들과 작은 소풍을 떠났다.
한강 건너기 대회에도 참가하며, 강인한 체력과 운동신경을 뽐냈다.
수영과 복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고, 잘생긴 얼굴에 꽃미남으로 불리며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젊음의 힘과 자유로운 꿈을 마음껏 누리는 청춘이었다.
우정자 님과의 만남
어느 날, 성종 씨는 아버지에게 우정자 님을 소개해 주었다.
우정자 님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고, 그 만남은 아버지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성종 씨는 나중에 우리 동네 정소장님의 딸 정임과 결혼했다.
처음은 어색했지만 곧 마음이 통했고, 사랑으로 이어졌다.
쉬는 날이면 아버지와 성종 씨, 그리고 우정자 님은 소박한 나들이를 다니며 마음을 나누었다.
여행을 하며 서로 마음을 확인했고, 그 시절 웃음과 설렘은 지금까지도 아버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돌아오는 길, 우정자 님이 건넨 사이다 한 병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청춘의 순수함과 따뜻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제대 후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멀어진 거리와 달라진 환경은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편지와 연락은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아버지는 스물여덟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며 또 다른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우정자 님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큰어머니께서 우정자 님이 아버지를 찾아 고향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때였다.
작은 체구에 단정한 모습, 조용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고, 그 장면은 내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치 먼 시절 청춘의 한 장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듯한 따스함을 느낀다.
우정자 님의 웃음, 조심스러운 발걸음, 아버지와 나눈 짧은 말 한마디까지, 큰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내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고 내 안에서 조용히 빛난다.
어린 마음으로 느낀 설렘과 따스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아버지와 우정자 님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를 부드럽게 감싸준다.
나는 어머니께 물었다.
“속상하지 않으셨어요? 왜 정성껏 밥을 지어 대접하시고 배웅까지 하셨나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멀리 평택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마음을 생각하면… 그 또한 그리움 어린 청춘 아니겠니.”
그 말에는 질투보다 깊은 이해와 연민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너그러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아버지께 다시 우정자 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9월, 병상에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은 우정자 님의 동생을 통해 전해 들으셨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는 긴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병상에서의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
때로는 섬망 증세로 엉뚱한 말씀을 하시기도 한다.
“고향집에 가서 소여물을 주겠다.”
“도지 500만 원 받아야 하는데, 400만 원만 받았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기억의 혼란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 또한 아버지의 살아 있는 추억이라 여기며 소중히 간직한다.
예전 같으면 “아버지, 그건 아니에요” 하고 바로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혼란스러워도 좋다.
그 안에 사랑과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버지께 남은 시간을 좋은 기억으로 채워 드리는 일이다.
그것이 지금 내 몫이라 믿고 있다.
에필로그: 사랑과 그리움의 기록
2009년 12월 15일, 어머니께서 암 진단을 받으셨다.
그날부터 나는 이별을 준비하며 슬픔과 후회 속에서 흔들렸다.
어머니는 내 삶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리움으로 내 안에 살아 계신다.
아버지의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말씀이 섞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여전히 사랑과 정을 찾으려 마음을 기울인다.
가끔 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질 때, 그 짧은 순간이 내게는 가장 큰 위로다.
나는 ‘그리움’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엄마, 나는 오늘도 당신이 너무 그립다.
아버지의 흐릿한 기억을 다독이는 이 손끝에, 엄마의 따뜻한 숨결이 스며드는 듯하다.
마무리: 기억 속에 머문 사랑
아버지의 첫사랑 우정자 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기억을 하나씩 기록하려 한다.
이 기록들이 내 삶을 채우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사랑은 멀어지고 인연은 흩어지지만, 기억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정자 님의 이야기가 이 글을 통해 다시 살아나길 바란다.
다음 연재에서는 2009년 어머니의 암 발병 이후와 2010년 8월 30일 어머니가 떠나신 날, 그리고 그 이후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