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2. 내가 사랑한 모든 _공간들 [우리 집_자취방 1]

by 정담

2년 하고도 3개월 전, 나는 독립을 했다.


처음 자취를 결심하게 된 건, 처음이자 아직까지도 마지막인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이다. 편도 한 시간 반, 출근 시간대에는 두 시간을 잡고 다녀야 하는 회사에 통근할 자신도, 체력도 없었다. 아직 대학교를 졸업시킨 지 반년 밖에 되지 않은 (엄마 한정) 어린 딸을 독립시키는 일은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쉽사리 허락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나의 언니가 선행해 준 덕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자취를 결심하고, 인턴 기간 동안 신세를 진 친구 집에서 한 달을 더 빌붙으며 처음 부동산이라는 곳에 발을 디뎠다.


아주 어릴 적, 엄마의 친구였던 아주머니의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핫초코를 먹던 기억 이후로 난생처음 혼자 가본 부동산이라는 곳은 정말 으-른의 공간이었고, 그들이 보여주는 방들이라고는 참 신세가 서글퍼지기 그지없었다. 스무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한 돈을 영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다리 하나 뻗으면 끝날 소박한 공간만이 나에게 허락되었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가 있어? 싶은 공간들도 달에 4-50은 지불해야 한다니, 뉴스에서나 간간히 듣던 서울의 부동산의 무서움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몇 군데의 부동산을 빨빨거린 다음에야 가격도, 위치도, 공간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걸어서 20분, 8평 남짓.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베란다도 있고 부엌도 분리된, 나의 공간. 물론 창문도 하나밖에 없어서 여름에는 걸핏하면 곰팡이가 생기고, 한 번 요리를 하면 밤새 그 냄새를 이불 삼아 잠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처음 생긴 나만의 집.


집을 떠난 게 처음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대학교 4년 동안 꼬박 2년을 기숙사에서 보냈다. 1학년, 스무 살의 패기로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의 통학을 한 이후 GG 선언을 한 나는, 처음으로 집이 아닌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도 내 방은 있었다. 스무 명가량의 학생들이 같은 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지만, 적어도 세면대는 방 안에 있고 침대와 책상도 있는. 다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간.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취향이 아닌 나의 마음대로 바디워시와 샴푸를 구매하고, 엄마의 잔소리 없이 자고 싶은 시간에 잤으며, 누가 깨워주는 일 없이 알람을 듣고 일어났다. 덕분에 씻고 난 내 몸에서는 자몽향이 났고, 드라마를 보며 뜨는 해를 맞이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수업이 시작하기 오 분 전에 눈을 떠 겨우 모자만 뒤집어쓰고 등교하는 일을 몇 차례 경험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굳이 굳이 몸으로 익힌 진리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정말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룸메이트는 주말마다 본가로 향했고 어떤 언니는 방을 내버려 두고 몰래 남자친구 자취방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또 어떤 동기는 기숙사에 치를 떨며 다시 통학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세면대 위까지 침범한 운동화와 장판을 찾아볼 수 없는 생활 습관을 지녔으며, 누군가는 밥 한 번 하지 않고 모든 끼니를 배달 음식으로 채우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야작을 위해 침대를 두고 다시 학교로 향하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레토르트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새벽까지 컴퓨터를 붙잡고 과제를 위해, 내 글을 위해 타자를 쳐댔으며 동기 방에서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수다를 떨며 2년을 보냈다.


그렇게 약간의 책임과 큰 자유를 보낸 후, 휴학을 위해 나는 기숙사를 떠나 다시 본가로 들어왔다. 그곳에서는 무궁한 엄마의 챙김과 자유의 상실이 있었다. 휴학 기간 1년은 그래도 괜찮았다. 절대로 휴학을 허투루 보낼 순 없다는 사명감 아래 주 5일의 아르바이트와 주 2회의 멘토링과 주말마다 나가는 대외활동이 있었으니까. 아직 내 자유는 여전했고 다만 집 복귀를 서두르는 독촉 전화와 약간의 잔소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문제는 휴학이 끝난 그다음 해, 세계적 역병 코로나의 창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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